한줄 詩

과거를 묻지 마세요 - 강세환

마루안 2017. 12. 7. 22:05



과거를 묻지 마세요 - 강세환



나는 벌판에서 대낮부터 낮술을 마셨다
그렇게라도 못하면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그날 직장에 연락도 없이 결근했다
그렇게라도 못하면 인간도 아니었다
나는 처음으로 외박하고 꼭두새벽에 들어갔다
그렇게라도 못하면 나는 남자가 아니었다
나는 밑도 끝도 없이 그녀에게 편지를 썼다
그렇게라도 못하면 죽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해 오월 시국 관련 시위에 가담했다
그러나 나는 끌려가지도 도망가지도 않았다
(그것이 내 생의 덫이며 닻일 줄이야!)
나는 낯선 교회에 들어가 무릎을 꿇었다
그렇게라도 못하면 지은 죄를 확인할 수 없었다
나는 밤에 일어나 낮에 쓴 시를 고쳤다
그렇게라도 못하면 나는 시인이 아니었다
나는 들판에 드러누워 생담배를 태웠다
그렇게라도 못하면 과거를 잊을 수가 없었다



*시집, 상계동 11월 은행나무, 시와에세이








어떤 속도 - 강세환



서울역 신문지 깔고 앉았던 사내가
왜 경주 흥륜사 터 수막새 얼굴처럼 웃었을까
행려(行旅) 대뜸 이르기를
뭐 그리 바쁘게 사느냐고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그 찡긋대던 눈빛
동대구행 ktx 고속철도
현재 생의 속도 시속 305킬로미터
엊그제 하룻밤 묵었던 동학사 민박집 마당에서
새벽녘 덜컥 눈 마주쳤던
계룡산 달빛에 젖어보는 것도
느긋하게 진고개 넘어
방아다리 약수터 저나무 곁에 다녀온던 것도
속도 잊은 차창 밖 눈발
흩날리다 흩어지던 그런 것도 한 순간이었다면
행여 내 가는 곳도 묻지 마라
민박집 마당에 꾹꾹 찍어 놓은
행방을 알 수 없는 어느 뭇짐승의 발자국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