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까닭 없이도 끄떡없이 산다 - 이병승

마루안 2017. 12. 7. 21:41



까닭 없이도 끄떡없이 산다 - 이병승



어제는 하루 종일
까닭 없이 죽고 싶었다
까닭 없이 세상이 지겨웠고
까닭 없이 오그라들었다


긴 잠을 자고 깬 오늘은
까닭 없이 살고 싶어졌다
아무라도 안아주고 싶은
부드럽게 차오르는 마음


죽겠다고 제초제를 먹고 제 손으로 구급차를 부른 형,
지금은 싱싱한 야채 트럭 몰고 전국을 떠돌고
남편 미워 못 살겠다던 누이는 영국까지 날아가
애 크는 재미로 산다며 가족사진을 보내오고
늙으면 죽어야지 죽어야지 하면서도
고기반찬 없으면 삐지는 할머니


살고자 하는 것들은 대체로
까닭이 없다



*시집, 까닭 없이도 끄떡없이 산다, 실천문학








변하지 않는 풍경 - 이병승



휴일 오후 대형 마트
반바지에 슬리퍼 남자들
연봉과 직급을 뗀 차림으로


쇼핑 카트에 꼬맹이 태우고
아내 뒤를 느릿느릿 걷다가
얼음 위의 고등어가 펄쩍 뛰어오르면
가슴에 파도친다, 나도 바다 사나이
내 키를 훌쩍 넘는 파도도 거침없이
곡예하듯 파도타기를 하며
세상을 삼키는


유기농 야채 코너를 지날 때면
시골 산자락 어디 쯤
번지도 없는 오두막에서
구름 덮고 한숨 늘어지게 자고 일어나
막걸리 한 사발 치고도 싶은
마음은 한계가 없어 쭉쭉 더 나가
지중해 어디 쯤 하얀 회벽 굽은 길
가방 하나 메고 내일로 떠돌다
부둣가 가시나 같은 이태리 여인과 한 세월
다 잊은 듯 늙어버리고 싶기도 하는


제기랄, 한 번쯤은 제값 다 치르더라도
다른 저 너머로 가보고도 싶겠지만





# 이 시를 읽다 보면 이유 없이 세상에 나왔으니 사는 것 또한 이유 없음이 맞을 것이다. 그렇다고 아무 생각 없이 살아야 한다는 것은 아닐 터, 아무리 하찮은 인생도 나름 거룩한 삶이다. 세상에 나오는 일은 내가 선택할 수 없었지만 어떻게 살다가 죽을 것인지는 자신이 선택하고 개척해야만 한다.


모든 사람의 지문이 다르듯 모든 인생이 똑같을 수는 없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치열한 경쟁도 해야 하고 실패와 성공으로 갈린다. 그렇다고 실패한 인생을 잘못 살았다고 할 수는 없다. 성공과 실패를 떠나 매사에 남과 비교하며 불만 투성이인 사람도 있지만 작은 것에 만족하며 유유자적 하는 사람도 있다.


굴똑 청소부가 함께 작업을 마치고 나왔다. 한 사람은 얼굴에 검뎅이가 묻었으나 한 사람은 멀쩡했다. 둘 중에 누가 얼굴을 씻을 것 같은가. 아무리 고단해도 인생이란 잠들지 못하는 희망을 품고 사는 것, 비교하면 지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