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희망에게 - 유영금

마루안 2017. 12. 1. 21:16



희망에게 - 유영금



믿지 않는다
네게로부터 버림받았음을
기억하지도 않겠다
나를 놓아 버리던 너의 잔인한 눈빛을
그러나 환장할 것 같은 하늘이 있어
그 하늘 아래서
네 손아귀에 휘둘리던 머리채를 눕히고
너를 기다리겠다
오지 않아도 좋아, 기다리기만 하겠다
기다리기만 하는 것도 유죄라면
무기수라도 괜찮아
구메밥 사발이나 핥다
떠나간 너로부터 서서히 살해되겠다



*시집, 봄날 불지르다, 문학세계사

 

 






안락사 2 - 유영금


 
사내는
떠나간 비둘기호 열차다

 

기적소리 떠도는 깊은 새벽
바람이 이불 깃을 당긴다
서둘러 일어나 목욕을 하고
알몸에 알콜을 바른다
약속한 바람은 경막 깊이 몰핀을 주입한다
사내가 처음 슬립을 벗기듯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바들바들 떤다
메스는 숨죽여 껍질을 벗긴다
경추 골을 둘러싼 껍질이
브래지어 끈처럼 흘러내리고
살점들 정교하게 도려진다
잘 발라진 뼈
통증 크기의 순서로 토막토막 잘려진다
피범벅은 수돗물에 말끔히 씻겨진다
연골 틈에 낀 통증의 찌꺼기까지,
압력솥에 가지런히 넣어 푹 끓인다
부글부글 통증이 뭉그러지며 익는 통증
뽀얗게 달여지는 냄새에 취해
아편연 한 개피 불붙이는 바람,
걸죽히 고아진 국물 한 사발
사라진 내가 게걸스레 들이킨다

 

잘 가라 개새끼야,


 



# 사랑했던 남자에게 배신을 당한 여자의 마음이 처절하게 읽혀지는 아픈 시다. 실제로 유영금 시인은 남편에게 버림을 받은 경험이 있기에 이렇게 실감나는 표현을 구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교통 사고를 당해 몇 달 동안 병원에 입원해 있는 사이 남편이 바람이 났고 병상에 누워있는 자신을 버리고 떠나는 남자의 뒷모습을 몸을 떨며 바라봐야만 했다. 그래서 믿음이 크면 실망도 크다지 않던가. 그래도 세월이 약이라는 말도 있듯이 다 살아지게 마련인 것은 동전의 양면처럼 상처와 희망은 공존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