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 박경리

마루안 2017. 11. 30. 22:52

 


옛날의 그 집 - 박경리

 


비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휑뎅그렁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꾹새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이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함께
정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
이 세상의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늘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박경리 유고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마로니에북스

 







가을 - 박경리

 


방이 아무도 없는 사거리 같다
뭣이 어떻게 빠져나간 걸까
솜털같이 노니는 문살의 햇빛

 
조약돌 타고 흐르는 물소리
나는 모른다. 나는 모른다. 그러고 있다
세월 밖으로 내가 쫓겨난 걸까

 
창밖의 저만큼 보인다
칡넝쿨이 붕대같이 감아 올라간 나무 한 그루
같이 살자는 건지 숨통을 막자는 건지

 
사방에서 숭숭 바람이 스며든다
낙엽을 말아 올리는 스산한 거리
담배불 끄고 일어선 사내가 떠나간다
 

막바지 몸부림인가
이별의 포한인가
생명은 생명을 먹어야 하는


원죄로 인한 결실이여
아아 가을은 풍요로우면서도
참혹한 계절이다 이별의 계절이다





# 박경리 선생의 유고시집에 실린 두 편의 시를 옮긴다. 예전에는 몰랐던 것들을 이 시집을 읽으면서 깨달은 것들이 많다.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이 말이 왜 이리도 가슴에 와 닿는 것일까. 어쩌면 이미 나는 늙어버린 것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