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여행자 ― 전동균

마루안 2017. 12. 1. 21:37



여행자 ― 전동균

 
 

일찍이 그는 게으른 거지였다
한 잔의 술과 따뜻한 잠자리를 위하여
도둑질을 일삼았다


아프리카에서 중국에서
그리고 남태평양의 작은 섬에서
왕으로 법을 구하는 탁발승으로
몸을 바꾸어 태어나기도 하였다
하늘의 별을 보고
땅과 사람의 운명을 점친 적도 있었다


세월이 흘러 지금은
눈먼 떠돌이 악사가 되어
온 땅이 바다고 사막인 이 세상을
홀로 지나가고 있으니


그가 지친 걸음을 옮길 때마다
흐름을 멈추고 다시 시작하는
저 허공의 구름들처럼
말 없는 것들, 쓸쓸하게 잠든 것들을 열애할 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시집, 오래 비어 있는 길, 민음사

 







초승달 아래 - 전동균

 


떠돌고 떠돌다가 여기까지 왔는데요
저문 등명 바다 어찌 이리 순한지
솔밭 앞에 들어온 물결들은
솔방울 떨어지는 소리까지,
솔방울 속에 앉아 있는
민박집 밥 끓는 소리까지 다 들려주는데요
그 소리 끊어진 자리에서
새파란, 귀가 새파란 적막을 안고
초승달이 돋았는데요


막버스가 왔습니다

헐렁한 스웨터를 입은 여자가 내려,

강릉場에서 산 플라스틱 그릇을 딸그락 딸그락거리며

내 앞을 지나갑니다
어디 갈 데 없으면, 차라리
살림이나 차리자는 듯



*시집, 함허동천에서 서성이다, 세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