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12월, 방랑자여 슈파로 가려는가 - 박정대

마루안 2017. 12. 1. 21:27



12월, 방랑자여 슈파로 가려는가 - 박정대


 
펄럭인다 또 몇 개의 바람을 흔들며
너는 펄럭이고 있다 겨울의 문 앞에 서서
외로운 파수병처럼 너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눈발이 날린다 하얀 기절의 눈발이 날린다
밤의 한기류 속으로 사랑이 흐른다 낯선
느낌표를 찍으며 굴뚝새들이 날아가고 아마
누군가 너에게로 다가가고 있다 잠시
기다려라 춥게 올지라도 사랑은 아름답다


시간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바람이 분다
밤이 빛난다 몇 개의 등불을 달고 너는
물음표처럼 웅크려 잠잔다 오늘밤은
별이 없다 그래도 하늘은 있다
젖은 하늘을 덮고 네가 잠들 때
저 성 밖에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 강물 소리
바람에 귀를 대어보면 멀리서
네게로 다가오는 소리 들리리니 잠시
기다려라 멀리서 올지라도 사랑은 아름답다


살아가는 데는 제목이 없다 다시
생각해 보아도 살아가는 데는 제목이 없다
너의 가슴팍으로 필사적으로 타오르는 불꽃
너는 외롭지 않다 다만 홀로 있을 뿐이로다
시간은 어디에서도 읽혀지지 않고
불면의 외로운 마침표를 찍으며 너는
아직 오지 않는 누구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로다
바늘 끝에 맺힌 핏방울을 보듯
우리의 생활은 가끔씩 아프지만
시간이 있는 곳에서는 늘 바람이 불고 잠시
기다려라 아프게 올지라도 사랑은 아름답다



*시집,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 민음사


 






소금쟁이 검객들의 이야기 - 박정대



나 언제 까치발로 그립게 서본 적 있던가
쑥뜸 뜨는 시간을 지나 안 아픈 풍경 쪽으로
나 언제 열망처럼 한 번이라도 날아오른 적 있던가
늦은 밤, 라면과 담배를 사 들고 들어와
고성산성처럼 높은 방의 창문을 열면
책상머리에 앉아 있어도 사행하는 푸른 추억
동강이 훤하게 다 보인다
열린 창문의 격변 그 너머로
소사 마을의 장광이 보이고
가수리 은은한 물결 속 어름치들의 노래
눈감아도 들린다, 그러나 지금은 낯선 서울
천둥 번개와 함께 비 내리는 나, 쓸쓸함이
때로는 외로운 한 마리 식물처럼 자라나
아무도 없는 지상의 황폐한 꿈을 가득 채울 때
사랑은 꿈으로도 멀리 갈 수 없는 못난 헛기침,
새벽이 오면 내가 키우는 난은 창가에서 잠들고
내가 키울 수 없는 난의 향기는
허공에서 잠들겠지만
난, 쉽게 잠들지 못하리 밤새
아무르, 아무르, 아무리 울어도
비오리, 고향에 갈 수 없으리
모든 게 물에 잠겨, 촌놈들
난초를 칼처럼 뽑아들고 물 위를 뛰어다니리
꿈 속에서, 바보처럼 제 기침 소리나 베며
소금쟁이 검객이나 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