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나는 나를 지나쳐 왔다 - 박노해

마루안 2017. 11. 23. 20:00



나는 나를 지나쳐 왔다 - 박노해



인생이 너무 빨리 지나간다
나는 너무 서둘러 여기까지 왔다
여행자가 아닌 심부름꾼처럼


계절 속을 여유로이 걷지도 못하고
의미 있는 순간을 음미하지도 못하고
만남의 진가를 알아채지도 못한 채


나는 왜 이렇게 삶을 서둘러 멀어져 왔던가
달려가다 스스로 멈춰서지도 못하고
대지에 나무 한 그루 심지도 못하고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하지도 못하고
주어진 것들을 충분히 누리지도 못했던가


나는 너무 빨리 서둘러 왔다
나는 삶을 지나쳐 왔다
나는 나를 지나쳐 왔다



*시집,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느린걸음


 

 




 
가난한 자는 죽지마라 - 박노해


 
가난한 자는 죽지 마라
외로워도 슬퍼도 죽지 마라
괴로워도 억울해도 죽지 마라


시위하다 맞아 죽지도 말고
굶어 죽거나 불타 죽지도 말고


가난한 자는 죽을 자격도 없다


가난한 자는 투신해도
아주 가벼운 깃털 하나
가난한 자는 분신해도
아주 차가운 눈빛 하나


가난한 자의 생명가치는 싸다


시장에서 저렴한 너는
잉여인간에 불과한 너는
몸값도 싸고 꿈도 싸고
진실도 싸고 목숨마저 싸다


가난한 자들은 죽을 권리도 없다
죽으려거든 전태일의 시대로 가 죽든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로 가 죽든가


제발, 가난한 자는 죽지 마라
선진화의 시장에서는 죽지 마라
돈의 민주주의에서는 죽지 마라


아, 가난한 자는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자


우리 죽지 말고 싸우고
죽을 만큼 사랑하자


가난한 우리는 가난하여 오직 삶밖에 없기에
사랑으로 손잡고 사랑으로 저항하고
죽을 힘으로 싸우고 죽을 힘으로 살아가자


제발, 가난한 자는 죽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