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회복기의 간을 위하여 - 정해종

마루안 2017. 11. 22. 20:00



회복기의 간을 위하여 - 정해종

 


새삼스럽게 비가 내린다
별일 아니라는 듯이
신경 쓰지 말라고 속삭여 놓고
슬그머니 바지 뒤축을 적셔온다


아무 일 없다고 해 놓고
속으로 썩어 문드러지는 게 암이다
그냥 저 혼자 깊어지는 게 병 아니더냐고
피식, 쓴웃음 날리며 떨어지는
죽음의 암세포들


우산을 챙겨오지 못한 건 내 잘못이 아니다
나보다 먼저 죽어간 내 주위의 사람들,
사소한 술주정을 마지막 모습으로 남기고
세상에서 북북 지워져 버린
그들의 삶도 내 탓은 아니다


어느 해이고 끝물에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폐장한 해수욕장에서 익사하고
꽃샘추위에 동사하는 사람들, 어처구니없는
그 비명횡사들이 알고보면 죄다
이미 갈 때까지 간, 돌이킬수 없는 병사이다


비를 맞는다
동아일보사 구관 레인보우 비전이 요약하는
하루와 더불어 내가 젖는다
사천만의 하루가 저렇게 간단하게 처리되는데,
집으로 가는 버스는 쉬 오지 않고
제철 아닌 철에 내리는 비와 나의 늦은 귀가는
좀체 요약되지 않는다



*시집, 우울증의 애인을 위하여, 고려원


 

 




 
푸른 소주병 - 정해종


 
파도가 없었다면 바다는 미쳐 버렸을 거라는,
미치지 않고서야 가 닿을 곳 없는 망망대해를
어찌 견디겠냐는 그의 말은 옳다
파고 없는 한 사람의 생애가 그러리라는 게
그의 밥상 위에 소주병이 놓이는 까닭이다
막잔 털고 누우면 그는 한겨울 밤 꿈 속에서도
심산유곡 같은 취기의 푸르름에 잠겼다가
깊은 곳에 자맥질 한번 하고는 첨벙첨벙 걸어 나온다


그에게 한 수 배운 게 있다
소주병 꼭지에 눈을 대고 세상을 보는 법,
마음을 비우고 들여다보면 아귀다툼 그칠 날 없던
아현동 뒷골목이 평화스럽게만 보인다
일순, 아현시장 앞에 출렁이는 푸른 바다
생선가게 위로 갈매기 울음소리 들려 오고
빼곡한 가옥들 사이 개미굴처럼 뻗어난 골목들이
죄다 숲으로 난 오솔길로 보인다


부시족(族)들이 코카콜라 병으로 들여다 본 세상의 모습을,
평온하던 사바나의 푸른 초원을 혼란으로 몰고 갔던
콜라 병의 위력을 나는 모른다, 그러나 한때
불을 품고 파열하는 뜨거움을 보여 주었던 소주병
제 속에 파도를 키우며 짧은 생애를 넘실거리는,
갈매기 울음소리를 들려주며 내 생의 안부를 묻는
너의 푸른 몸, 네 몸이 푸른 이유를 이제 알겠다
거기에 꽃 한 송이 꽂아 창가에 놓아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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