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술집, 독고다이 - 조항록

마루안 2017. 11. 23. 20:51

 

 

술집, 독고다이 - 조항록
-공간 응시자 2

 

 

서로 도우며 사는 것이 인생이란 것을
나는 알지 못한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술 한잔 추렴하는 것이
삶의 풍요라는 충고를
짧은 거짓일망정 위안이란 현실을
나는 믿고 싶지 않은 것이다


다시 겨울이 오고
창밖에는 삼복의 열기가 들끓거나 말거나
또다시 나의 날카로운 겨울이 오고
차가운 술잔에 담기는 것은 폐허
가끔 웃으며 미래를 들먹이기도 하지만
서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무엇도 없으니


나는 술잔을 내려놓고
차라리 깊고 깊은 잠에 빠져든다
그 꿈속에서 말똥가리가 퍼덕퍼덕 날갯짓을 하고
자유는 노동의 품삯임을
밥과 안락이 지리멸렬의 대가임을
그 슬픔을 깨닫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여 우리는 두번 다시 건배를 외치지 말자
빈 술잔에 아무도 술을 따르지 말고
저마다 어둠으로 사라진 뒤
홀로 술잔 앞에 앉아야 한다
그제야 내가 나에게 안부를 건네며
삭풍 몰아치는 시절을 견딘다


 

*조항록 시집, 여기 아닌 곳, 푸른사상

 

 

 

 

 

 

식당, 따뜻한 식욕 - 조항록
-공간 응시자 4

 

 

낡은 식탁 구석에 앉아 끼니를 때우는데
나비 한 마리 날아와 하늘거린다
호접몽을 이야기하려는 것인지
그저 별 탈 없이 끼니를 잇는 내가 갸륵해서인지
나비 한 마리 콩자반과 어묵조림과
된장찌개 사이를 유람하며 살랑거린다
손을 내저어 나비를 쫒으려다
뭐 묻은 파리도 아닌데 어떻겠나 싶어
나는 못 본 척 살그머니 수저를 움직인다


곰곰 따져보면 밥상이 꽃밭 아닌가
누구의 정성이 노란 프리지어로 피어나고
찬 없이 차린 외로운 밥상에도
패랭이꽃만큼은 괜찮았던 시절이 있지 않았느냔 말이다
꿀을 찾다 길을 잃은 나비의 허기에 대해 생각하며
된장찌개에 쓱쓱 밥을 비벼 배를 채우는데
여태껏 식당을 떠나지 못하는 나비는
어쩌면 나의 식욕을 유심히 관람하는 것이다
한 그릇의 끼니로 다시 걸음을 내딛으려는
나의 생명을 한없이 응원하는 것이다


잠시 길을 잘못 들어섰어도
나비와 나의 식욕은
둘이 함께
아름다운 꽃밭을 거니는 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