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좋은 사람 때문에 - 이성부

마루안 2017. 11. 22. 20:35



좋은 사람 때문에 - 이성부
― 내가 걷는 백두대간 5

 


초가을 비 맞으며 산에 오르는
사람은 그 까닭을 안다
몸이 젖어서 안으로 불붙는 외로움을 만드는
사람은 그 까닭을 안다
후두두둑 나무 기둥 스쳐 빗물 쏟아지거나
고인 물웅덩이에 안개 깔린 하늘 비치거나
풀이파리들 더 꼿꼿하게 자라나거나
달아나기를 잊은 다람쥐 한 마리
나를 빼꼼이 쳐다보거나
하는 일들이 모두
그 좋은 사람 때문이라는 것을 안다
이런 외로움이야말로 자유라는 것을
그 좋은 사람 때문이라는 것을 안다
감기에 걸릴 뻔한 자유
그 좋은 사람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비 맞으며 산에 오르는 사람은 안다

 


*이성부 시집, 지리산, 창작과비평


 






저를 낮추며 가는 산 - 이성부



이 산줄기가 저 건너 북쪽 산줄기보다
나지막하게 나란히 내려간다
허리 굽히고 고개를 숙여
조심스럽게 봉우리 하나를 일군 다음
자꾸 저를 낮추며 간다
그러다가 또 뭇봉을 일으켜 세우더니
무엇에 취한 듯 드러눕는 듯
금세 몸을 낮추어 부드럽게 이어간다
머지 않아 이 산줄기 키높은 산을 만들어
더 나를 땀흘리게 하리라는 것을 나는 안다
아 이런 산줄기가 크게 될 사람의
젊은 모습이어야 한다는 것을 하나 배운다
저를 낮추며 가는 길이 길면 길수록
솟구치는 힘 더 많이 쌓여진다는 것을
먼발치로 보며
새삼 나도 고개 끄덕이며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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