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벗고 들어가는 그곳 - 황지우
아파트 15층에서 뛰어내린 독신녀,
그곳에 가보면 틀림없이 베란다에
그녀의 신이 단정하게 놓여 있다
한강에 뛰어든 사람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시멘트 바닥이든 시커먼 물이든
왜 사람들은 뛰어들기 전에
자신이 신었던 것을 가지런하게 놓고 갈까?
댓돌 위에 신발을 짝 맞게 정돈하고 방에 들어가,
임산부도 아이 낳으로 들어가기 전에
신발을 정돈하는 버릇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가 뛰어내린 곳에 있는 신발은
생은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것은 영원히 어떤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다만 그 방향 이쪽에 그녀가 기른 열대어들이
수족관에서 물거품을 뻐끔거리듯
한번의 삶이 있을 따름이다
돌아보라, 얼마나 많은 잘못 든 길들이 있었는가
가서는 안 되었던 곳
가고 싶었지만 끝내 들지 못했던 곳들;
말을 듣지 않는, 혼자 사는 애인 집 앞에서 서성이다
침침한 밤길을 돌아오던 날들처럼
헛된 것만을 밟은 신발을 벗고
돌아보면, 생을 '쇼부'칠 수 있는 기회는 꼭 이번만은 아니다
*시집,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 문학과지성
망년 - 황지우
세브란스 병원 영안실 뒤편 미루나무 숲으로
가시에 긁히며 들어가는 저녁 해;
누가 세상에서 자기 이외의 것을 위해 울고 있을까
해질녘 방바닥을 치며 목놓아 울었다는 자도 있으나
이제 얼마나 남았을꼬
아마 숨이 꼴깍하는 그 순간까지도
아직 좀더 남았을 텐데, 생각하겠지만
망년회라고 나가보면 이제 이곳에 주소가 없는 사람이 있다.
동창 수첩엔, 벌써 정말로 졸업해버린 놈들이 꽤 된다
배나오고 머리 빠진 자들이
소싯적같이 용개치던 일로 깔깔대고 있는 것도
아슬아슬한 요행일 터이지만
그 속된 웃음이 떠 있는 더운 허공이 삶의 특권이리라
의사 하는 놈이, 너 담배 안 끊으면 죽는다이, 해도
줄창 피우듯이 또 한 해가 가고 또 한 해 잊는다
# 황지우의 대표 시집이다. 기형도의 <입 속의 검은 잎>과 함께 내가 가장 자주 읽은 시집이기도 하다. 1998년 12월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초판이 나왔다. 소설가 이인성이 발문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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