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그 조용한 힘이 - 허순위

마루안 2014. 12. 26. 08:25



그 조용한 힘이 - 허순위



새 달력을 벽에 걸 때쯤이면
얼음 뒤집어쓴 붉은 꽃을 보았다


살아있어서 두 다리가 없는 동네 헬스클럽 관장은
오늘도 우람한 근육덩어리의 상체로 삶을 조율한다


얼음의 속을 바둥거리지 않고
꽃을 꽃으로 열심히 피우는 생의 한가운데
피를 얼릴듯한 얼음의 중앙통도 있는데


눈을 굴리며 파닥거린다 내가 살았는지
어디 가는지 어찌어찌 살아가겠다는 건지


얼음 속 붉은 꽃인 양 가만히 있으면
몸이 알아갈 것을


얼음의 부대 안에서 슬픔은
가만히 두려움 없이 숨쉬지 못한다


잠깐 쉬는 양 가만히 있기가 이렇게 힘드는 일인가
사랑을 처음 간직할 때의 그 조용한 힘이 다했는가



*시집, 소금집에 가고 싶다, 들꽃








황폐한 사람 - 허순위




가고 싶다 황폐가 안이 아니고
황폐가 밖에 있는 사람 그에게로
그런 사람은 마음이
환하게 빛날 것 같다
황폐의 옷이 있어 유행이라면
너도 나도 종로로 선능으로
길을 누빌텐데
L시인처럼 근사한 황폐는 못되더라도
가고 싶다 살고 싶다
황폐가 안이 아니라
근사한 바깥인 나라
몸 안에 황폐를 버틸 힘이 있다면
굳이 가고 싶지도 않겠지만
안에서 숨못쉬는 이 황폐가
썪어가는 피 같은 황폐가
무서운 -누런- 미칠듯한 황폐가
뱅뱅 도는 황폐가
바깥인 사람이라야 살아가겠는데
자꾸 살은 찌고
이 환한 워선 같은 황폐를
등골을 배먹는 황폐를
황폐한 황폐를
나에겐 황폐를 옷입을
햇빛이 너무 가늘다
버틸 수도 나갈 수도 없는 내 안의 황폐


누가 이 황폐와 더불어 살까




*자서


모두의 슬픔이 반짝 거린다
없는 것을 푸근하게 있게 하는
저 바닥에도 바람이 분다
소금집에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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