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이력서 - 오은

마루안 2014. 12. 2. 20:40



이력서 - 오은



밥을 먹고 쓰는 것.
밥을 먹기 위해 쓰는 것.
한 줄씩 쓸 때마다 한숨 나는 것.


나는 잘났고
나는 둥글둥글하고
나는 예의 바르다는 사실을
최대한 은밀하게 말해야 한다. 오늘밤에는, 그리고


오늘밤에도
내 자랑을 겸손하게 해야 한다.
혼자 추는 왈츠처럼, 시끄러운 팬터마임처럼


달콤한 혀로 속삭이듯
포장술을 스스로 익히는 시간.


다음 버전이 언제 업데이트 될지는 나도 잘 모른다.
다 쓰고 나면 어김없이 허기.
아무리 먹어도 허깨비처럼 가벼워지는데


몇 줄의 거짓말처럼
내일 아침 문서가 열린다.


문서상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다.



*시집,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문학동네








엑스트라 - 오은



우리는 표정을 지을 수 없습니다 보통은 거리를 걷거나 커피를 마십니다 식어빠진 커피도 호호 불며 마실 수 있습니다 우리의 역할 뒤에는 2나 3 같은 숫자가 붙습니다 운이 좋으면 장면에 불쑥 끼어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려면 아예 악하거나 무능해야 합니다 험상궂은 얼굴이 도움이 될 때도 있습니다 뺨을 맞거나 정강이를 걷어채고 장면 밖으로 내팽개쳐지기 일쑤입니다 고개는 끝까지 땅에 처박고 있어야 합니다 고개를 들면 감독이 좋지 않다고(NG) 소리칩니다



현장은 목욕탕입니다 우리는 발가벗은 채로 일회용 문신을 해야 합니다 출렁이는 물 안에서 두둑한 뱃살을 출렁대며 영역 표시를 해야 합니다 우리에 속하기 위해, 우리가 되기 위해 누군가가 또 탕 안으로 들어옵니다 그만큼 우리의 비중은 줄어듭니다 자리싸움을 위해 발을 뻗고 손을 휘젓습니다 나지막이 헛기침을 하기도 합니다 온탕의 물이 넘쳐흘렀지만 우리 중 누구도 동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여분입니다 한 번도 부족한 적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방금 죽었습니다 큐 사인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도로 위해 가짜 피와 진짜 가래를 토했습니다 아스팔트에 붙은 껌이 코끝을 간질입니다 또다시 죽지 않기 위해서는 재채기가 나와도 참아야 합니다 땅바닥과 더 친숙해져야 합니다 그림자를 덮쳐 한 몸이 되어야 합니다 진짜 피와 더 진짜 가래가 나오려고 합니다 비정한 카메라는 우리의 뒤통수를 우아하게 날아갑니다 주인공이 입가의 피를 훔치며 승리의 미소를 짓고 있습니다


촬영이 끝났습니다 조명이 꺼졌습니다 오늘도 두 번을 죽다 살아났습니다 2가 되었다 3이 되었다 정신없었습니다 이제 일당을 받고 현장에서 흩어질 시간입니다 기약 없는 인사를 하고 진짜 행인이 되어 거리를 거닐 겁니다 커피는 꿀맛 같을 겁니다 다행히 우리 중 일부는 내일 아침 다시 살아납니다 주인공에게 시비를 걸기 위해, 길거리에서 핫도그를 사먹기 위해,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시민이 되기 위해, 또 다른 2와 3이 되어 화면 속에 비집고 들어가기 위해






# 소설 읽듯 아니면 산문 읽듯 찬찬히 읽어보면 젊은 시인의 문장 다루는 실력이 놀랍다. 막 서른 살을 넘긴 젊은 시인의 시라고는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세상을 보는 눈이 깊고 예리하다. 두번 째 시집에서 그의 시를 제대로 읽었다. 주목할 만한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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