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우물쭈물 우물쭈물 - 이진명

우물쭈물 우물쭈물 - 이진명 벌써 오래됐다 예전엔 내가 그렇게 우물쭈물한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 언제부턴가 완전 우물쭈물이 된 게 우물쭈물, 말도 생각도 몸도 우물쭈물 밤에 꾸는 꿈마저도 우물쭈물이다 따르릉 따르릉 비켜나라고 우물쭈물하다가는 큰일 난다고 하는 어린애들 노래가 있는데 정말 큰일 나겠다 어린애들 노래 속에서라면야 세발자전거에 콩 부닥치는 정도겠지만 정말 큰일 나겠다 달아나긴 달아나야 하는가본데 막 달아나야 하는가본데 *시집, 단 한 사람, 열림원 배꽃 시절 - 이진명 열일곱일라나, 저 배꽃, 배꽃들 하얗게 미쳐 피었다 나, 열 하고 일곱일 때 엄마가 상심한 듯 말했다 옛말에, 미쳐도, 이쁘게 미친다는 말, 있는데 네가, 그짝인 게, 아니냐 조그만 아니 커단 향낭이 순간 터진 듯 쓰거운..

한줄 詩 2019.01.31

14번째의 표적 - 백성민

14번째의 표적 - 백성민 남이 보지 못한다는 것이 그저 다행이라는 웃음의 뒤 끝에는 바늘 틈 사이로 무방비적인 허기가 한판 도박의 최면을 건다. 어린 숙녀의 눈부신 종다리가 바람을 탓하지는 않듯이 오늘 내게 온 허기진 한때를 부정하지 않는다. 가볍다는 이유 하나로 비상을 꿈꾼다는 것이 떨어져야 하는 필연성을 담는 것이라면 직각으로 상승하는 퇴화의 날갯짓을 더는 젓지 않으련다. 흐름을 멈춘 물이 막아진다고 숨어들 곳을 찾지 못하는 것이 아니 듯, 어느 한 때 소멸의 뒤편으로는 아직도 검은 강이 흐르고 그 강줄기 어딘가에 흘러야 하는 분명한 이유 하나 있다면 다시 올 허기가 반갑지 않으랴. 분명한 이유 하나 있다면,,,,,. *시집, 죄를 짓는 것은 외로움입니다, 아름다운사람들 백정 - 백성민 노련한 손놀..

한줄 詩 2019.01.31

노숙 - 김주대

노숙 - 김주대 공원 나무탁자 위에 버려진 캔을 사내의 팔꿈치가 슬며시, 넘어지지 않게 밀어본다 묵직하다 옆 사람을 힐끗 쳐다본 사내는 낚아채듯 캔을 들어 먹이 문 길고양이처럼 재빨리 자리를 옮긴다 나무 그늘 아래서 목을 뒤로 활짝 젖히고 시커멓게 열린 목구멍 안으로 캔을 기울이자 남은 음료가 질금질금 쏟아진다 울대뼈가 몇번 꿈틀거린 후 길게 내민 허연 혓바닥 위로 캔 속의 마지막 한 방울이 똑, 떨어진다 빈 캔의 둘레를 핥으며 자리로 돌아온 사내의 때 묻은 팔꿈치가 얌전한 고양이처럼 탁자 위에 앉아 다시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시집, 그리움의 넓이, 창비 한 끼 - 김주대 무릎이 많이도 튀어나온 때에 전 바지의 사내가 마른 명태 같은 팔로 몸의 추위를 감싸고 표정 없이 걷다가 시장 입구 버려진 사과 앞에..

한줄 詩 2019.01.31

낭만적 동결(凍結) - 전형철

낭만적 동결(凍結) - 전형철 젖은 그늘 아래서 천궁 귀퉁이에 박힌 얼음 조각을 바라본다 종일 아이들이 헤집어 놓은 운동장에 흔들리던 바람의 입자들이 한순간 지상으로 쏟아져 내릴 때 우리들의 시간은 동공으로 매몰된다 송곳 모양을 한 짐승들은 사방의 결계 속에 차고 고독하게 굳어 간다 참으로 오랜 세월 달과 별을 바라보다 생의 예언과 죽음의 좌표를 읽어 낼 때 저녁의 소리를 떠올린다 어둠의 매몰과 빛의 질주 낮밤의 얼굴, 살아갈 나와 살처분된 어제로부터의 나 그물코를 깁듯 절망과 고요의 흔적이 가슴께를 뚫고 들고 난다 죽음은 연대와 거리가 먼 행성의 이름이다 *시집, 고요가 아니다, 천년의시작 분열의 율법 - 전형철 부장된 동검이나 거울에 쌓인 먼지의 막막한 시간 보낸 것과 남은 것의 틈 길은 반투명 유리..

한줄 詩 2019.01.30

별까지 깨 귀뚜라미 소릴 듣는 밤 - 한명희

별까지 깨 귀뚜라미 소릴 듣는 밤 - 한명희 피멍이다 떨어지면 끝장인 나무에 붙어 바둥거리다 단풍 든 낙엽들 바닥에는 한 방울 피도 보이지 않는데 머리를 쿡쿡 쥐어박는다 바닥으로 패대기친다 매달리고 악을 써봐도 결실 없는 내 가을 속으로 묘목처럼 무럭무럭 자라야 할 자식들 내일은 또 어느 구조에 붙어 떨어지지 않으려 바둥거려야 하는지 애써 가둬두고 묶어두려 해도 재채기처럼 튀어나오는 이런저런 생각들 어느 구름 속을 떠돌다 내게로 온 독감인지 툇마루까지 튀어나온 잠은 먼데 사막에라도 든 것처럼 고요한 집엔 흔들어대면 와르르 떨어질 것 같은 별들뿐 바람귀에 붙어 가끔씩 뒤척이는 낙엽과 귀뚜라미 그 숨차오는 소리뿐 *시집, 마이너리거, 지혜 브라보, 파고다공원 - 한명희 어미고양이 새끼 둘을 거느린 검은고양이..

한줄 詩 2019.01.30

각기 걸어가고 있는 - 최준

각기 걸어가고 있는 - 최준 개 한 마리가 걸어가고 있다 저 개는 어디서부터 걸어오기 시작했는가 무엇 때문에 걸어오고 있는 것인가 어디까지 갈 것인가 오늘 아침 끼니는 거르지 않았는가 했다면 무엇으로 배 채웠는가 점심은 뭘로 때울 것인가 어두워지면 여관에라도 들 것인가 노숙할 것인가 영영 혼자일 것인가 동행을 만날 것인가 지나온 길을 돌아 볼 것인가 가끔 지난 시절 그리워할 것인가 뛰어가기도 하고 포복자세로 가기도 할 것인가 길을 잃어버리고 길 아닌 곳으로 접어드는 경우도 있을 것인가 후회할 것인가 굶기를 밥먹듯 할 것인가 구걸도 해볼 것인가 차라리 길에서 아름답게 죽을 것인가 고심에 찬 개가 가고 있다 저마다의 심중대로 의지대로 한 마리의 무수한 개들이 각기 걸어가고 있다 *시집, 개, 세계사 이런 길..

한줄 詩 2019.0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