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가을에 도착한 말들 - 이기철

마루안 2022. 9. 23. 22:58

 

 

가을에 도착한 말들 - 이기철

 

 

나무가 봄에 보낸 말들이 가을에 도착했다

열매를 쪼개면 봄의 말들이 한꺼번에 쏟아진다

나의 무지는 바람과 햇볕의 전언을 알아듣지 못했다

풋 순이 열매의 몸으로 둥글어지는 동안

아무래도 나는 동시대의 비극에 등한했나 보다

전쟁 뉴스를 보며 밥을 먹고

세 개의 태풍을 맞으면서 희랍 비극을 읽었으니까,

창궐하는 바이러스에 모처럼 지구가 한 가족이 되는 날도

무덤들에게 그곳은 편안하냐고 묻지 않았으니까,

물소리를 따라나서던 한 해의 발이 멈추는 곳에

데리고 오던 생을 물끄러미 세워 둔다

나무에게도 나에게도 생이란 것은 무거운 것이니까,

몸이 야윈 바람이 텅스텐 소리를 내면

더는 수정할 수 없는 문장을 종이 위에 눌러 쓴다

열매의 말은 페이지가 너무 많아

손가락에 침 묻혀 넘겨도 다 읽을 수가 없다

 

 

*시집/ 영원 아래서 잠시/ 민음사

 

 

 

 

 

 

가을 타는 나무 - 이기철


씻어서 내 몸이 가벼워진다면
나는 내 속옷을 씻듯 단풍잎의 얼굴을 씻어 줄 것이다
온몸이 눈이신 하느님처럼
가을이 길 위에서
갓 핀 맨드라미의 수를 세고
아침에 져 내린 과꽃에게
한 주렴 순금 빛을 덮어줄 때
그때 나는 마침표 없는 서정시를 쓰며
그동안 내가 곡해한 세상 앞에 나아가
무릎 꿇고 사죄할 것이다
아침이 오고 저녁이 오는 일도
햇빛의 일과임을 깨닫는 일 기쁨 아니랴
내 키 높이로는 도무지 굽어볼 수 없는 세상을
경전을 읽듯 엎드려 읽으며
곧 놀러올 저녁별도 제 힘을 다해
생업을 일으켜 반짝이는 것을 보리라
아픈 세상에 베개를 베어 주고
그의 이마를 더운 물수건으로 닦아 주리라
제 몸이 악기가 된 나뭇잎이 음악 소리를 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