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고독과의 화해 - 류시화

마루안 2022. 9. 19. 22:11

 

 

고독과의 화해 - 류시화


이따금 적막 속에서
문 두드리는 기척이 난다
밖에 아무도 오지 않은 걸 알면서도
우리는 문을 열러 나간다
어쩌면 그것은 우리 자신의 고독이
문 두드리는 것인지도
자기 밖으로 나가서
자신을 만나기 위해
문 열 구실을 만든 것인지도
우리가 사랑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우리를 발견하기를 바라면서

 

 

*시집/ 꽃샘바람에 흔들린다면 너는 꽃/ 수오서재

 

 

 

 

 

 

접촉 결핍 - 류시화

 

 

만약 자신이 죽었는데 그 사실을 모른다면

당신은 허기를 느낄 것이다

뱃속 허기가 아니라 피부의 허기를

당신의 피부는 접촉을 원하지만 이제는

그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가벼운 포옹, 어루만짐, 우연한 스침도

봄바람마저 당신의 얼굴을

간지럽힐 수 없다 다가가 손을 내밀지만

뼛속까지 투명한 혼이 되어

누구도 그 손 잡을 수 없고

그 손 또한 다른 손 잡을 수 없다

살아 있을 때 당신은 접촉을 두려워했다

상처 줄까 상처 입을까

그림자 인형으로 살았다

서로 맞닿은 것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아무 접촉도 하지 않는 그림자놀이 속

인형으로

하지만 육체가 없는 지금

당신이 갈망하는 것

당신이 질투하는 유일한 것은

서로 만지고 입 맞추고 껴안는 행위

그것들 모두 가능했던 때를

그리워하면서

격렬한 통증 같은 접촉 결핍으로

혼이 점점 희미해져 가면서

 

 

*접촉 결핍 - 관계에 있어서 친밀함의 요소가 부족하면 인간은 배가 고픈 것처럼 '접촉 결핍(skin hunger)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