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이불 - 박상천

마루안 2022. 9. 7. 22:00

 

 

이불 - 박상천

가을을 지나 겨울

그리고 그 겨울이 깊어졌지만

어느 날 문득,

덮고 있는 이불이 여름 거 그대로임을 알았다.

간혹 바뀐 이불의 두께와 무게로,

혹은 달라진 이불의 냄새로

계절이 바뀌었음을 느끼곤 했다.

그녀가 떠나기 전까지는 분명 그랬다.

그러나 이젠

시퍼런 가을 하늘도,

펑펑 쏟아지는 하얀 눈도 아무 의미가 없다.

그 의미없는 시간의 한 구석 어딘가에

나는 버려져 있을 뿐이다.

의미 없는 시간의 찬바람이

초라한 이불 속을 파고드는 밤,

아, 이불장 속 압축팩엔

그녀가 넣어둔 지난 계절이 그대로 남아 있을까?

압축팩 지퍼를 열면

그 계절의 따뜻한 냄새가 부풀어 오르며

되살아 날 수 있을까?

 

 

*시집/ 그녀를 그리다/ 나무발전소

 

 

 

 

 

 

정리 - 박상천

 

 

어쩌면 삶을 정리할 시간이 없이

홀연히 떠나는 게

더 좋은지도 몰라요

당신이 그랬듯이.

 

뒤에 남아

그것들을 정리해야 하는

사람들의 슬픔도 있겠지만,

정리하고 정리하고 정리해도

어디 우리 삶이 그렇게 깔끔하게 정리가 되나요.

 

그럴 바엔 손때 묻은 물건들,

늘 입던 옷가지,

함께 찍었던 사진,

소중하게 간직했던 컴퓨터 파일,

침대맡에 놓은 책,

연락처와 일정이 남아있는 휴대전화도

그냥 남겨놓고 가는 거지요.

 

그것들을 정리하는 일은

남겨진 사람들에겐 고통이겠지만,

떠나기 전 깔끔하게 정리했다고 해서

어차피 남겨진 사람들의 마음속 슬픔까지

정리해주고 떠날 순 없잖아요.

 

남겨진 사람들이

남겨진 물건들을 정리하며

슬픔을 정리하는 시간을 갖는 게 좋은지 몰라요.

 

그러니 안타까워 말아요.

아쉬워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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