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내가 머문 이 자리에 - 박노식

마루안 2022. 9. 7. 21:51

 

 

내가 머문 이 자리에 - 박노식

새순이 올라오기 전에 꽃부터 걱정하는 마음처럼 조바심은 나를 흔든다

언젠간 오겠지만, 마른 가지를 어루만지며 입김을 불어 넣은 지 세 해가 다 되어도 꽃소식은 없다

꼭 보겠노라 애를 졸이며 종일 골목길을 배회하던 그 시절의 그리움보다 더 큰 불안이 여기에 있다

지나가던 이웃이 '너무 정을 주어도 잔병치레가 많고 결과 보기가 어렵다'고 말한 기억이 떠올랐지만,

어린 목련 묘목을 심고 해마다 퇴비를 주고 또 하루에도 수십 번 눈길을 주었으니 사람 같으면 질려서 숨이 막히고 괴로웠을 것이다

내가 머문 이 자리에 게으름을 잔뜩 남기고 타인보다 뒤쳐진 한 계절을 누린다

*시집/ 마음 밖의 풍경/ 달아실

 

 

 

복사꽃 아래 서면 - 박노식

복사꽃 아래 서면

문득 내가 비참해진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 날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쓰러져

한 사나흘 푹 잠들고 싶어질 때가 있다

몽중에 누굴 호명할 일도 없겠지만

그래도 고단한 한 생을 만나

서로 꽃잎 먹여주며 몹시 취해서

또 한 사나흘 푹 잠들고 나면,

무언가 잃어버린 것 같고

무언가 잊어버린 것 같은

그래서 아슴한 저녁나절 밖으로 나올 때는

딴 세상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처럼

멍한 나를 발견했으면 한다

복사꽃 아래 새들 머문 적 없으니,

언제쯤 헛것에 끌려가지 않고

언제쯤 그물에 떨어지지 않고

아름다운 이 색계(色界),

무사히 걸어 나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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