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사랑의 목소리로 - 박판식

마루안 2022. 9. 2. 22:01

 

 

사랑의 목소리로 - 박판식

 

 

튀긴 물고기와 가느다란 사랑, 그리고 사랑 없는 관공서의 조용한 오후

나는 마침내 내 인생에서 서울을 발견한다, 삼만오천 평의 하늘

그 모퉁이에서

어린아이는 장난감 자동차를 밀고

하얀 두루마기를 걸친 구름이 잔뜩 짜증난 왕처럼 관악산을 넘어온다

 

밀과 보리가 자라네, 밀과 보리가 자라네

 

골프공이 골프채에 얻어맞는 소리, 이것이 인생이다

꿈에 나는 일등석 기차를 탔다, 헛수고였다

알몸의 흑인 여자를 만졌다, 헛수고였다

소나무 냄새 나는 소년이 작은 명상 속에서 생겨났다 오솔길로

사라졌다, 헛수고였다

 

왕이 짜증을 내면 왕비는 불안하고 우울했다

먹고 마시고 춤추고 노래 부르고

이 세상의 법칙에 속아 넘어가지 않으면

또 어쩔 텐가

 

빌려 입은 옷 같은 인생, 떼쓰는 어린애를 안고 정부 보조금을 타고

이상한 미로를 헤매듯 고통과 슬픔만을 골라 디디는 신기한 인생

 

무사하게 죽고 싶다, 인생은 재난이 아니다

밀과 보리가 자란 것은 누구든지 알지요

 

 

*시집/ 나는 내 인생에 시원한 구멍을 내고 싶다/ 문학동네

 

 

 

 

 


크로노미터 - 박판식


사촌은 서른이 넘었는데도 아직 어머니 속을 썩이고 있다
유부녀를 잠시 만나더니, 지금은 건강식품 방문판매를
하겠다고 돈을 빌리러 다닌다

누군가의 인생이 갑자기 급커브를 그릴 때는
누구라도 그에게서 한 걸음쯤 물러서야 하는 법이다

엄마 눈치 보느라 주차장에 나와
쭈그려 앉아 담배 피우는 이혼녀나
고깃집에서 종이봉투에 쇠수저를 넣고 있는
옆집 아주머니의 새 아르바이트를 볼 때도 그렇다

흰색 보드판 앞에서 젊은 고물상 주인이
늙은 여자와 가벼운 실랑이를 벌일 때도
그들의 배후에서 천장 없는 가건물로 폐품들이
더 올라갈 수 없는 높이로 올려지고 있을 때도

나는 생각하게 된다


늘어난 양말 속에 넣어둔 탓에 흘려버린 돈 구천원을 찾으려고
횡단보도와 구제 옷가게와
석바위시장을 지나 일하는 다방까지 샅샅이 뒤지고
돌아온 뚱보 그녀를

인생은 얼마나 더 큰 커브를 돌다 쓰러져야만 끝나는 게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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