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바깥에 대하여 - 황현중

마루안 2022. 9. 3. 21:20

 

 

바깥에 대하여 - 황현중

 

 

세상의 바깥이 없다면 어떻게

안으로 들어가겠어

꽁꽁 언 손을 엄니가 어떻게

따뜻한 아랫목에 넣어 주겠어

 

바깥이 없다면

새벽에 오줌 누러 나갔다가 바라보던

달과 별과 여치 울음소리는 어쩌라고

엄니의 품속으로 기어들어 가 더듬던

그 까만 젖꼭지는 어쩌라고

 

인심 좋은 애비가 어떻게

동네 사람들을 집 안으로 불러들여

신김치에 막걸리 한잔 대접하겠어

바깥이 없다면

고맙다고 누가 인사나 하겠어

잘 가라고 누가 손이나 흔들겠어

 

세상의 바깥이 없었다면

내가 세상으로 나가

이만큼 사람 노릇이나 했겠어

귀여운 어린애들 머리 한번

쓰다듬을 수 있겠어

어떻게 세상을 어루만지겠어

 

밖에서 더듬지 않으면

손을 더듬지 않고

입술을 더듬지 않고

서로가 얼싸안지 않으면

그녀를 만나 사랑이나 한번 했겠어

 

 

*시집/ 구석이 좋을 때/ 한국문연

 

 

 

 

 

 

선풍기 - 황현중

 

 

요즘 들어 고장 잦은 늙은 선풍기

수리하고 돌아오는 길

입가에 잠시 미풍을 돌리다가

덜거덕 토해내는 한숨

먼지 낀 노구의 눈에서

붉은 노을이 질금질금 샌다

 

요새는 성능 좋은 에어컨도 모자라

최신식 무풍까지 나왔단다

바람 없는 에어컨과 노인 없는 세상,

잘 맞는 궁합이라고

요즘 같은 세상에 고장 난 선풍기

끼고 사는 자식 어디 있더냐고

수리점 풍 씨의 말이 이내 서럽다

 

기록적 폭염이 예상된다는 일기예보

집에 있으면 위험해요, 할머니

동네 이장이 무더위쉼터로 나오라고

신신당부하고 돌아갔지만

고장난 선풍기끼리 한숨 반 울음 반

징징거리는 그곳은 정말 싫다

 

너만은 흙 파먹고 살지 말라고

등 떠밀어 보낸 자식

살아생전 다시 볼 수 있을까

구부러진 날개로 통풍 앓는 긴 밤

달빛이 논두렁에 마중 나갔다가

여치 울음 가득 데려와 토방에 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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