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서 지나고 며칠 이따 - 한명희
시루떡 같은 바위가 부르르 몸을 떤다
안개가 단번에 걷히고 두 개 나이 든 여자의
젖가슴 같은
능선 앞에서 머리카락 쭈뼛, 선 나는
아내가 싸 준 도시락을 일 삼아 먹고 있었는데
가시 돋친 침엽수 사이로 솟은 해가
바위 밑에 연신 불을 지피고 있었다
또 어떤 날엔 바위가
공원 한쪽 부서진 짱돌처럼 날아다녀서 놀란
눈퉁이는
숨을 곳을 찾는 길고양이가 되고
발톱 빠진 발등은
끈 떨어진 신발 속에 젖어 있고
또 어떤 날은 도시락을 들고
출근하는 척 학교 가는 아이들과 현관문을 나서는데
옷 갈아입느라 두고 나온
해고통지서가 생각나서
처서 지나고 며칠 이따
고사떡을 돌리던 어머니의 손으로
아버지가 불이 나도록 뺨을 때리고 있었다
*시집/ 아껴 둔 잠 / 천년의시작
룰렛 - 한명희
나는 언제부터 길 건너 빌딩에 있는 저 계단과 대리석 문의 밖이 돼 있었을까? 잠든 아버지의 얼굴에 침을 뱉고 집 나온 사춘기 아이처럼 해종일 먹을 것도 없이 싸돌아다니다 다시 와 생각하니
만약에 지구가 저 계단 위 문처럼 모난 사각이었다면! 그래서 수직과 수평, 상하좌우 모두 제자리에서 올곧고 반듯하게 살 수 있었다면! 그때도 우리는 원만하게 살자고 서로를 헐뜯고 때로는 내키지 않는 웃음도 얼굴 가득 지어 가며 이를 악물고 다녔을까?
지구를 반 바퀴나 돌아 남미 칠레 어딘가로 간 친구처럼
둥글게 살자니 겹치고 부딪쳐서 돌아 버리겠다고
네 식구 목숨 같은 직장을 때려치우고 뚝섬 유원지인가 잠실 근처 석촌호에선가 낚인 물고기처럼
눈만 뜨면 숨을 곳을 찾던 아버지도 그래서 누군가에 총을 겨눈 심정으로 복권을 사고 경마장을 달리는 마권으로 살다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술을 찾게 된 분노조절장애자는 아니었을까?
저 대리석 문 앞에서 또는 계단 밑에서
누군가가 지켜보는 가운데
삼십 년도 넘게 지하철과 버스를 타기 위해 경주마처럼 뛰고 또 돌아도 변두리
구멍가게를 벗어나지 못하는 삶에
니 아부질 봐라 모진 돌이 징(정) 맞는겨 징 맞어! 하시던 엄마도
결국엔
자세 반듯한 직사각 관에 드셨는데 정사각 납골당에서 영영 사시는데
# 한명희 시인은 대전 출생으로 2009년 <딩아돌하>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마이너리거>, <마른나무는 저기압에 가깝다>, <아껴 둔 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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