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그래도 우리는 - 변홍철

마루안 2022. 8. 28. 19:48

 

 

그래도 우리는 - 변홍철

 

 

역류성식도염, 불면증

치통과 가려움증, 몇 개의 중독

우울과 도착, 망상과 관음증들

 

그 얼굴이라고 해서

온기가 없으란 법은 없다

뻔뻔한 표정 뒤의 수치를 모를 리가 없다

괜찮다, 같이 살자

 

제자리를 지키며 이따금

서로 손등을 핥아주며

발바닥을 주물러주며

 

친구 몇은 더 데리고 와도 좋다

얇은 잔고를 아껴가며 밥을 나눠 먹자

내 남은 수명의 앞섶을 기꺼이 열어주마

 

그러니 지나가는 너희는 비웃지 말라

우리의 다정한 거처를 넘보니 말라

 

가령 내전의 검은 먼지가

나와 이 가련한 동거인들의 처마 위로 밀려올 때조차

 

발맞춘 행진곡과 폭죽 소리와 화약 냄새가

흰 구름의 커튼을 사납게 들출 때조차

 

여린 천의 바자울을 걷어차며

낡은 해와 죽은 별의 껍데기와 무딘 쇠붙이

신념들이 새겨진 깃발, 깃발들이 떠내려올 때조차

 

오랜 내 망명의 식객들과 병든 나와 조용히

연민의 술잔이나 마주치는 것을

너희는 비웃지 말라, 우리의 서러운 거처를 넘보지 말라

 

흉흉한 소문에 두려워 않고

작은 회오리 엉거주춤 들떠 일어서지도 않고

 

엉성한 악기라도 남은 현을 어루만지며

이 곡조의 마지막 소절을 접어

저 강물 위에 띄워 보내는 날조차

 

같이 살자

이 기나긴 부끄러움의 다리 아래에서

우리의 새 무덤이 조금씩 잠기는 것을 노래하며

서로의 묘비명을 적어주며

끝까지 조금은 부끄러워하며

 

그래도 우리는 같이 살자

 

 

*시집/ 이파리 같은 새말 하나/ 삼창

 

 

 

 

 

 

일몰의 노래 - 변홍철

 

 

걷자

 

애틋하게

남은 술 한 모금을 털어 마시듯

 

다시 어둠이 오고

길은 더 미끄러워지리니

 

걷자

 

얼어붙은 빨래처럼

허공에 널어두었던 기도의 말들

자모조차 엉켜 딱딱해지더라도

 

북풍이 막아선 저 길은

우리의 몸피만큼 밀고 가는 것

 

날카로운 고드름처럼

들숨이 목젖을 향해 번뜩, 위태로워지더라도

 

붉은 수치를 마저 들이켜며

너와 나의 입술과 혀끝이 그날,

언 땅에 묻은 깃발처럼 굳어가더라도

 

걷자

 

혼자가 되더라도, 절뚝이더라도

빈 잔의 공허 따위는 노래에 담지 말자

 

불면의 눈썹 끝에

기어이 별빛의 증류

한 방울, 두 방울, 다시 맺히는 우리의 밤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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