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미안한 노동 - 이용훈

마루안 2022. 8. 26. 21:26

 

 

미안한 노동 - 이용훈

 

 

흙가마 앞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불쏘기개로서

한낮의 대기를 극복하기 위해 스스로를 불사르고 활활 타올랐던 사람들 새까맣게 타버린 몸을 이끌고 복도를 걷습니다

호이스트 승강기 안에서 화강석을 들고 있는 당신을 생각합니다

21층으로 아니면 더 높이 올라가는

덜컹덜컹 무심하게 올라가는 동안 오로지 당신이 들어갈 곳의 크기와 오차 치수만을 고민하는

당신의 몸이 적당한 크기로 절단되고 무탈하게 놓이기만을 바랄지도 모르겠습니다

 

후끈한 열기가 응어리져 있습니다

나이지리아 사람 몽고 사람 때로는 동양 라이트급 챔피언으로 무리 지어

어두컴컴한 모텔 복도를 이리저리 걷습니다 당신들은 타월을 충분히 달라는 요구도 시원한 물이 냉장고에 준비되어 있는지도 쉽사리 입을 떼지 못합니다

세워지는 모든 존재들은 당신들의 두 손에서 체결되는데

당신들이 머무는 객실은 축축하고 마르지 않는 속옷과 수건들로 가득합니다 누구의 것인지도 모른 채 쓸어내고 훔쳐도 솟아나는 돌가루와 체취만이 방 가득 흐트러져 있습니다

눅눅한 바닥은 눅눅함으로 널브러짐은 널브러짐으로

노동자가 머물고 있는 객실은 여전히 구겨지고 흐트러져 있어서 당신들이 떠나는 그날까지 나는 당신들이 묵고 있는 객실의 청소를 마치지 못할 것 같습니다 끝내지 못한 나의 노동은 당신들이 짊어지고 나르는 화강석보다 가볍다 생각들고 당신 수첩에 끄적인 인력사무소 목록 한줄에도 미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수건과 생수 필요하시면 테이블 위 인터폰 0번 눌러주세요 객실에서 빨래는 가급적 삼가주시고요 수건의 얼룩 물어보니, 시멘트 물이라네요 지워지지 않아서 버려야 할 것 같습니다 현장 나갈 때 가지고 나가지 말아주세요 용품 관리 못한다고 모텔 사장님에게 한 소리 들었습니다

 

 

*시집/ 근무일지/ 창비

 

 

 

 

 

 

오산 스타렉스 - 이용훈

 

 

사장놈이 의리 찾더라 두 손 붙잡길래 돈 벌러 와서 그딴 거 눈꼽만큼도 생각 없다, 했다 허허벌판에서 별 생각 한다, 했다 믿고 맡길 사람 너뿐이다(그 의리 돈으로 치환될 수 있을까?) 웃돈 쳐준다, 했다 기숙사에서 몇놈 사라졌단다 근데 왜 나를 불러 세워, 지가 할 것이지 역 앞에서 승합차 세우고 '잡부 셋' 소리 질렀다 뭣도 모르고 사내들 손짓하고 악다구니한다 달려들더라, 몇놈 데려다 연결해줬더니 사내들이 그르모* 그러더라 운전대 잡는 거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고, 그러고 함께 웃고 자빠졌다 그르모 그르모 그러길래 그 그르모가 대체 뭐요? 웃긴 왜 웃어, 등에서 식은땀 솟구쳐서 장딴지까지 강줄기 생기더라 밤이면, 밤 되면 기름통에 빠져 잠이 와야지 뒤적이다 빨갛게 염색된 눈알 뒤집어까고 공장을 뒤척였다 스타렉스에 시동 걸어놓고 이참에 그 길 찾아봐야겠다, 했다 왜냐고? 원래가 그렇게 생겨먹고 싶어서 생겼겠냐? 너희들이 그렇게 부르니까 새벽마다 배달가니까 우습냐? 공장에서 말 잘 듣는 개 노릇 톡톡히 하고 있었다 주말특근 꼬박 챙겨 먹고 야근하라면 꼬리 흔들고 좋아죽겠다 시늉했다 벌판에서 사는 거 별거 없다, 했다

 

 

*방글라데시 사람들은 나를 그르모가 불렀다. 그르모는 포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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