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폐막식 - 최백규

마루안 2022. 8. 27. 21:27

 

 

폐막식 - 최백규


집에 오면 죽을 마음이 사라져 있었다 집 안 가득 쌓인 그림자로 문을 막으면 여름이 온다

학기가 끝나버린 직후 네온사인이 늘어선 바닷가에 앉아 있었다 취한 채 갈비뼈에 손마디를 맞추다가

 

열이 들뜨도록


무더운 주말에는 열차가 한강의 어깨를 숨차게 쓸어내렸다 우리는 텐트에서 추운 지방의 만화책을 쌓아놓고 엎드려 있었다 나무들이 눈더미를 뒤척이는 소리를 읽으며

이마에 묻은 바람이 서녘으로 말라가고 있었다

물바닥에 어두운 여름이 일렁였다

밴드 동아리와 얽히며 그들의 몸에서 나뭇가지 냄새를 맡을 때 혹은 앰프를 연결해 종일 바닥을 차고 울려 퍼진다든가

 

멍청하게


포물선을 그리는 농구공을 바라보며 환하게 소리치고 새로 산 옷을 느슨하게 풀고
해변에서 폭죽을 터뜨리다가 입을 맞추었던
파도와

멀어져가던 웃음소리

우리가 그 여름에 버리고 온 것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이렇게 아플까

대관람차 너머로 해가 넘어가는 일을 보다가 너무 많은 밤이 지나가버리고 그것을 다시는 붙잡을 수 없다는 감상 정도가 어렴풋했다

다음 날 아침 집으로 돌아오던 버스에서 게임기에 건전지를 갈아 넣으며 이제부터 습작들만 크로키 하게 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몸속에 싱싱한 핏물이 돌고 돌아 우리를 다 태워버릴 때까지

멈추지 않는 이상 이 육체를 계속 사용할 예정이다

호흡이 뜨거워질 정도로 쏘아 올리면 단 한번만이라도 빛날 수 있을까
창밖에는 눈발이 몰아치는 언덕이 적막하다

 

시리도록 흰 여름이다

 

 

*시집/ 네가 울어서 꽃은 진다/ 창비

 

 

 

 

 

 

애프터글로우 - 최백규


신을 배운 이후로 미안하다는 말보다 죽이고 싶다는 마음이 많았다

세상 모든 곳이 다 오락이어서
캐릭터들이 죽는데 플레이어가 동전을 계속 넣었다

어느 주말 오후 흰 캔버스를 세우고 멍하니 그리워했다 있는 것들만 죽여 저녁을 먹고 다음 날 아
침 그 사람을 웃으며 안았다 손끝으로 상대방의 생명선을 끝까지 따라가본 사람은 죽을 때까지 같
이한다는 비극을 믿었다 우리가 금방 죽을 거라 했다

어젯밤 꿈에 눈이 부어서 오늘도 젖은 하루를 살았다 창밖엔 숲 이외의 것들만 조용히 번져서
우리의 기후가 같을까 무서워졌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날 아무 일 없이 골목을 걸었다

와락 쏟아지다 터뜨려지는 파스텔이다

어두운 식탁에 앉아 찬 음식을 오래 씹어야만 하는 나이
무심히 낯선 여름이 굴러가고
두려웠다

지옥이 무너지기 시작하자 안녕과 안녕을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바늘 끝 위에 몇명의 천사가 쓰러질 수 있을까

―사랑해, 태어나줘서 고마워

그때쯤 결심한 것 같다, 세계가 망가지더라도 시를 쓰자 아름답게 살자 남은 인생을 모두
이 천국에게 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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