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역전 - 김영언

마루안 2022. 8. 16. 22:09

 

 

역전 - 김영언

 

 

배고픔이 가장 큰 추억이었던 시절

허기를 달래기 위해 마지못해 먹던 것들이 있다

 

미처 봄이 다시 오기도 전에

보리쌀을 채웠던 뒤주 바닥이 드러나면

자물쇠 채워진 아랫방 고구마 섬을 넘석거리고

뒤꼍 감자 구덩이 속에 짧은 팔을 길게 넣으며

일 나간 부모 몰래 끼니를 뒤져내던 유년이 있었다

 

풍요가 병이 된 현대의 빈곤 속에서

비만을 예방하기 위해 빈곤을 강요하는 아내가

반어적으로 차려내고 있는 풍요로운 식탁에서

소화불량의 추억을 마지못해 되씹고 있는

내 눈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날마다 식구들을 검진하고 있는 고구마와 감자는

구미 좌르르 흘러넘치는 흰 쌀밥 대신

반전 없는 역전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었다

 

 

*시집/ 나이테의 무게/ 도서출판 b

 

 

 

 

 

 

나이테의 무게 - 김영언

 

 

어느 겨울 산등성이 비탈에서

가파른 생을 버텨내던 밑둥치

통째로 싹뚝 잘린 채

트럭에 실려 온 나무들

 

화목을 자르다가

수십 년 혹한을 인내한

둥글고 단단한

나이테의 무게를 어루만진다

 

아궁이 속에서

한 겹 한 겹 해체될 때마다

다색 연기로 피어오르는

나이테의 사연을 경청한다

 

속세의 가파른 자락에서

온몸 구석구석 두르고 섰는

아직도 단단하게 결구되지 못한

내 나이테의 무게를 꾸벅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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