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첫맛과 끝맛 - 성은주

마루안 2022. 8. 10. 22:00

 

 

첫맛과 끝맛 - 성은주

 

 

입 안 가득 번지는

팽팽한 길을 더듬는

그 맛이 나를 키워 냈다

 

엄마 젖꼭지에서 하얀 피가 돌던 날

눈물이 핑 돌던 날

첫맛은 항상 나를 달게 위로했다

밀어내도

게워 내도

맛이 맛을 찾아가듯

아득한 냄새에 침이 고였다

 

오른쪽보다 왼쪽에서 먹을 때

사람과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럴수록 맛은 더 깊어졌다

 

비릿한 저녁이 저물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그해 장마를 기다렸다

 

*

 

눈 뜨면 지극히 평범한 맛

짜내도

짜내도

단물 빠진 껌처럼

함부로 버려진 그릇에 금이 갔다

 

엷은 통증이 줄 타고 흐르는 날

먹으면서 숨 쉬는 엄마를 봤다

옆에서 나는

매운맛이 당겼고

맛없는 것들을 죄다 뱉어 냈다

 

살갗 깊숙이 식어 가는

엄마를 뒤집고 뒤집어도

자꾸 식어 가는

 

푸른 젖가슴이 부풀어 오르면

엄마의 끝맛이 아프게 열린다

나는 그 맛에 운다

 

 

*시집/ 창/ 시인의일요일

 

 

 

 

 

 

거울, 불면증 - 성은주

 

 

거울아, 눈 감지 않는 거울아

널 따라 네 몸에 들어가 날 팔고 싶은데 쉽게 잠들지 않는 오늘 공기를 검게 가두고 밤을 익혀도
들어가겠다고 눈 감겠다고 숨겠다고 물고리 한 마리 저리게 흔들며 울어도 주변만 물렁해지네
락스를 풀어 놓은 듯 같은 색깔로 기록을 남기지 네 문 속에 담긴 침묵은 착실했어 비명은 이제 병들었다고,
모두 치아를 보이고 혀를 보이며 말 걸어왔지

바다도 아닌 태양도 아닌, 파도 같은 빛으로 지뢰 밟듯 널 닮아가지 네 몸 안에서 물장구를 치면 생리적인 연주에 음표를 달면 스륵스륵 수로가 열리고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거울아 조각조각 우리는 우리를 낳고 유령처럼 불어났구나 이제 마취제가 필요할까 항우울제가 진실할까
지워지지 않는 거울의 지문은 하얗게 밀가루로 번져 개처럼 울고,
차라리 녹아 버리는 편이 좋겠지
코카인에 중독된 최면이라면
타르에 그을린 악몽이라면
피를 토해 내며 찢겨질 듯 부재를 남겨 놓고
혼자, 힘으로, 어서, 내 관 짜 놓고, 영원히, 자자,

 

 

 

 

# 성은주 시인은 충남 공주 출생으로 한남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1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창>이 첫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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