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 - 최백규
해변에서
깨끗한 하복이 마르고 있었다 하얗게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생각했다 우리는 칠이 벗겨져도
썩지 않는구나
손을 모아
죽지 않는 행성을 만들었다
폭설을 떠올려도 하품할 수 있는 절기였다
그러나
눈을 감고 바람을 맞을 때마다
너의 울음소리가 밀려왔다 이것을 포옹이라 불러도 될지
오래 고민했다
언제쯤 나를 멸망시켜야 하나 걱정되었다
더는 새장을 씻길 이유가 사라져도 욕실에 웅크려 앉아 샤워기를 쥔 마음으로
모래만 털다가
부스러진 날엔
잠든 너를 위해 휘파람을 불어주었다
도저히 눈물이 잡히지 않아서
저 세계에서는 내가 죽은 역할이구나 이해했다
눈처럼 재가 날리는 곳에 닿으면 어디까지가 꿈이었는지 돌아볼 수 있을까
고개 숙인 모두가 손바닥을 적시는 사이
그들의 행성을 훔치고 싶어졌다
유성우를 기다렸다
*시집/ 네가 울어서 꽃은 진다/ 창비
돌의 흉곽 - 최백규
호스피스 병동 한구석에 누운 그는 강바닥에 묻힌 돌이었다
병실마다 선산이었다
지금 가슴을 열지 않으면 암세포가 파고든다는데 수술비는 삼촌이 도박으로 탕진한 지 오래였다
사채업자들이 드나들기 시작하자 그는 자루 안에서 질질 끌려가는 것처럼 웅크렸다 여생 동안 돈에 묶여 물속으로 유기된 셈이다
언젠가 나는 물 바깥에서 배를 뒤집은 돌과 눈을 맞추며 앉아 있었고
어느 날 일터에서 귀가한 그는 가족에게 바람을 쐬러 계곡으로 떠나자 했다 주말 저녁이라 차들이 밀려나와 아주 어두워서야 황량한 저수지에라도 닿을 수 있었다
그맘때가 돌아오면 수면에 돌을 던지고 환하게 번져나가던 그의 웃음이 어른댄다
쓰러진 후부터 그는 매일 관을 내리듯 떨어진 꽃만 주웠다 어릴 적 어머니와 지키던 고물상 터로 돌아온 듯이 천막을 견디는 흉곽이 너울거렸다
나는 강바닥으로 가라앉으며
그의 심장을 머언 바다로 밀어주고 싶었다
# 최백규 시인은 1992년 대구 출생으로 명지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14년 <문학사상>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네가 울어서 꽃은 진다>가 첫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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