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벽도 창공이 될 수 있다고 못은 생각했다 - 이윤승

마루안 2022. 7. 29. 21:43

 

 

벽도 창공이 될 수 있다고 못은 생각했다 - 이윤승


머리통이 견고한 못은
노래가 되지 못한 노래를 부르며 단련되었다


꽉 조이며 맞물리던 시간에서
못은 얼마나 단련되며 길들여졌나

흰 벽을 우듬지라 믿으며
걸어놓은 빨간 모자가 열매인 줄 알고 쪼아 먹으며
후렴구가 모두 같은 노래를 부르며
웅덩이 빗물처럼 벽안에 고여 있었다

고여 있는 물이라는 생각을 잊고
흐르는 물처럼 때로는 경전처럼
명상의 자세로 앉아 있으면 벽이 창공이 될 수 있을까

자목련 서 있는 꽃밭으로 눈길이 간다
나무 어깨에 이마에 박힌 자줏빛 꽃송이들
바람이 망치질을 할 때마다
나무를 빠져나온 꽃잎들
날개를 파닥이며 새처럼 창공으로 날아간다

먼 눈빛으로 사람들이 벽이라 느낄 때
못은 꽃잎처럼 날개를 펴고 창공으로 그 너머로
마음껏 날아가고 있는 것이다

 

*시집/ 사랑이거나 다른 종이거나/ 문학의전당

 

 

 

 

 

백 년 후 - 이윤승


벽 안에 갇힌 채
어둠을 단물처럼 음미하면서 단련되었다
단련된다는 것은 콘크리트의 이빨이 다 빠지도록
살아내는 것이다

비명을 끌어안은 나뭇등걸처럼
그는 전생의 어느 망치로 살았길래
지금은 되돌려져 못이 되었나

녹슨 시간들이 벽 안에 실핏줄처럼 번져 있다
오도 가도 못했다는
그림자 같은 말만 하고 있다
벽 안의 소심한 주관자임을 자백하고 있다
저 벽을 들어 올릴 수는 없을까

백 년 후쯤
벽이 바스러져 조금씩 가루로 흩날릴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콘크리트 같은 단단한 벽을 돌다리처럼
딛고 건너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오지 않을 시간일지라도
허방이라 해도 기다릴 것이다
확률은 낮겠지만
이미 너무 늦었지만


 

 

# 이윤승 시인은 전남 완도 출생으로 2014년 <제주작가>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눈가에 자주 손이 갔다>, <사랑이거나 다른 종이거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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