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감나무 아래에서 - 김애리샤

마루안 2022. 7. 28. 22:23

 

 

감나무 아래에서 - 김애리샤

 

 

가지가 휘어지도록 우르르 생겨난 감들

그중 작고 못난 감들을 밀어내는 나무

떨어진 감들은 감나무 아래 풀섶 어딘가에

떫은 피로 스스로의 상처를 덮는다

 

아홉 살 애란이가

아침에 눈 뜨면 제일 먼저 하는 일

감나무 아래로 달려가는 일

이슬에 발이 다 젖도록 상처난 감들을 줍는 일

 

풋감 몇 알 주워 쌀독에 묻어 두면

상처에 새살 돋듯 주홍색으로 예쁘게 익어 가던 감

빨리 예뻐지라고 손가락으로 살살 눌러 보면서

애란이도 말랑말랑 익어 갔다

 

이파리조차 많이 달지 못하는 늙은 감나무 아래에서

풀섶을 뒤적인다

작은 상처들이 아물어 가며 달콤해진다는 것을

사십 년 전 아이는 알고 있었을까

 

각자 다른 곳에서 같은 계절들을 지나온 사이

제가 맺은 열매를 제가 버리며

나무는 무슨 생각을 하며 늙어 갔을까

 

 

*시집/ 치마의 원주율/ 걷는사람

 

 

 

 

 

 

분꽃 - 김애리샤

 

 

앞뜰 화단 가득 분꽃이 피었네

칠월이라 아직 환한 저녁 무렵

소심한 나팔처럼 하나씩 분꽃이 피어나면

엄마는 저녁을 지었네

아궁이 앞에 앉아 있는 엄마의 얼굴은

분꽃처럼 진분홍색이었네

 

별이 뜨지 않는 밤

분꽃들은 등이 되어 앞마당을 밝혔네

올말졸망 모여앉아 뜨지 않는 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았네

그때까지 집에 오지 않은 아버지는

한 번이라도 분꽃 등을 본 적이 있었을까

 

아침이면 밤하늘이 문을 닫듯

분꽃들도 얼굴을 감췄네

밤새 작은 바람 소리에도 엄마는

자주 뒤척였고

엄마의 아침도 분꽃처럼 닫혔네

평생을 분꽃처럼 살았네

 

분꽃 씨앗처럼 까맣게 쭈글쭈글해지던 엄마

화장터 화구에 들어가기 전 곱게 분칠했네

분꽃 씨앗 한데 모아 터뜨리고 하얀 가루 받아내어

곱게 분칠했네

 

죽어서 제일 예쁜 엄마 얼굴

진분홍색 한지로 분꽃 꽃다발 만들어

관 속에 누워 있는 엄마 발치에 놓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