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여기에서 - 황현중

마루안 2022. 7. 29. 21:34

 

 

여기에서 - 황현중

 

 

너무 멀리 가지 않기로 한다

다시 돌아와야 할 여기

오늘을 잊지 않기로 한다

두근두근 오늘을 떠나지만

지친 발걸음이 쉴 곳은

애오라리 여기뿐

작은 죄가 늙은 어미의 품에 안기고

열두 줄 가야금의 현을 누르듯

슬픈 사람들의 숨소리가 잦아드는 여기에서

하루의 후회를 정갈하게 다듬어

일기장 안에 눌러 쓰고

떠오르는 눈썹달 바라보면

저절로 솟는 쓸쓸한 미소 같은 오늘을

가득 사랑한다

너무 멀리 가지 않도록 한다

다시 돌아와야 할 여기까지

나를 생각하고

너를 그리워한다

세상 안에 온몸 부린다

 

 

*시집/ 구석이 좋을 때/ 한국문연

 

 

 

 

 

 

길바닥 - 황현중

 

 

소중한 줄 몰랐습니다

날마다 흔들리는 내 발걸음을 든든하게

떠받치고 있는 이 길바닥이

길바닥 모퉁이에 핀 개불알꽃이

예쁜 줄 미처 몰랐습니다

옆구리에 가시덩굴을 껴안고

가슴팍에 돌멩이를 박아 넣고도

아픈 날 없이 꽃 피는 이 길바닥이

고마운 줄 여태 몰랐습니다

못나고 눈물 많은 나를 닦아 주고

일으켜 세워 주던,

쌀독 밑바닥을 긁고 또 긁어

보릿고개 너머에 길을 열어 준

어미의 손바닥 같은 이 길바닥을

한 번도 쓰다듬어 주지 못했습니다

 

살아 생전 제 어미 등 한번 시원하게

긁어 주지 못했다며

새벽마다 길바닥을 쓰다듬고 있는

내 친구 환경미화원 만석이는

오늘도 길바닥에 떨어진 구릿빛 동전을

어미의 유언처럼 거두어

쌀 한 말 팔아 걸머지고

아픈 등 긁어 주러 양로원에 간답니다

제 어미가 기다리는

하늘나라 가는 길 닦으로 간답니다

 

 

 

 

*시인의 말

 

초록의 몸부림

많았던 울음과 가파른 노숙의 날들

그러나 생은 多一無의 여정

무성한 생각을 삭히고

속도를 줄이고

여기 고즈넉한 뒤안길에서

느꺼운 호흡

텅 빈 바람으로

노을 깊숙한 살 속에 나를 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