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은유로서의 질병 - 이현승

마루안 2022. 7. 27. 22:07

 

 

은유로서의 질병 - 이현승


다시 태어난다면 하고 생각해 본 적 있지만
다시 태어나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후회가 없는 사람은 없고
우리는 모두 실패한 적이 있지만,
그래서 실패의 기원으로 가서
기원을 제거해야 하는 것은
터미네이터-T1000의 일이겠지만

다시 태어난다면 유감스럽게도
액체 금속이나 최첨단 나노 갑주도 없이
기껏 두부처럼 무른 살가죽만 걸치고 태어나야 한다.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빨거나 쥐는 것,
먹고 싸고 울고 웃는 게 전부일 뿐이며

더욱이 우리에겐 기억이 없을 것이므로
시간을 거슬러,
마땅히 되돌아온 이유를 모르는 우주 전사의 처지란
기실 우주 미아와 같을 것이다.

나는 전생을 믿지 않고
다시 태어나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을 만큼
철두철미한 현실주의자이지만
코끝 벌름거리게 하는 간지러운 봄바람에 날려
막 암술에 도착한 꽃가루 같은 생을 생각하니
삶이란 늘 의미에 목말랐던 것이다.

미래를 잃어버린 사람들이란 속류 쾌락주의자이며
진정한 미래주의자는 비관주의자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우리에게 꽃가루만큼이라도 의미가 필요하다면
처세의 철학보다는 파산이나 암 선고가 더 빠를 것이다.

암술에 도착한 꽃가루란 하나의 기적이다.
다시 해볼 것도 없이.

 

 

*시집/ 대답이고 부탁인 말/ 문학동네

 

 

 

 

 

 

질문 있는 사람 - 이현승

 

 

말매미 한 마리가 우화하지 못하고 죽어 있다.
벌어진 번데기 등을 반쯤 빠져나오다 멈췄다.
다른 매미들의 벌건 울음을 배경으로
결국 이게 다인가요?
오늘 아침의 마른 하늘을 쳐다보며
나는 물었다. 하늘은 묵묵부답.
신은 대답하지 않는 한에서 신이었다.
정말이지 모든 것을 안다면
말해줄 수 없을 것이다.
스스로 대답해본다.
불행을 배경으로 삶을 보면
어떤 일도 견딜 만해진다.

하지만 불행해지지 않기 위해서 살지 말라고

충고해준 것은 개미들이었다. 쇠똥구리였다.

멋쟁이딱정벌레였다. 어떤 이야기의 끝은

다른 이야기의 시작이었다.

그것을 알려준 것은 구더기들었다.

그러므로 파산을 통과한 중에

또다른 파산을 예고하는 것.

행복을 소실점으로 멀어지다보면

가치 있는 것들은 다 멀리 있었다.

그러나 오늘 실패의 교훈,

다른 결과에 대해 같은 이유를 발견하지 말 것.

같은 결과에 대해서도 다른 원인을 찾을 것.

매미들의 울음소리가 신의 음성처럼 울려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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