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종달새 - 이정록

마루안 2022. 7. 23. 22:32

 

 

종달새 - 이정록


엄니,
벌써 와서 죄송해요.

수업 중에 집에 오던 버릇,
아직도 못 고쳤구나.
하여튼 애썼다.

도망친 건 아니에요.
저도 이렇게 일찍 올 줄 몰랐어요.
근데 저만 몇겹이나
잔디 이불을 덮었네요.

뼈마디만 남아서
어미는 평토장도 무겁단다.
고단할 텐데 며칠 푹 자거라.
억하심정이야 말해 무엇하겠냐만
천천히 평생토록 얘길 나누자꾸나.

엄니도 좋은 꿈 꾸세요.
그런데 아버지는 왜 
아무 말씀 안 하신데요?

녹아버린 애간장과 
울화통이 또 터진 게지.
곧 뼈마디 추려서 일어나실 거다.
아버지가 칠성판을 발로 차도
죽은 척 누워 있거라.

꽃 필 때 보자.
아버지도 봄에는
종달새처럼 말이 많아진단다.

 

 

*시집/ 그럴 때가 있다/ 창비

 

 

 

 

 

 

첨작 - 이정록


달밤에 지방을 태우고
엄니와 마루에 걸터앉아 뽕짝을 부른다.
아버지도 없는 집에서 노래 불러도 된다니?
엄니는 스무살 색시로 돌아가 틀니를 고쳐 물고
하늘에서 무릎장단 소리 들려올 때, 찰칵!
엄니의 웃음은 언제나 천의무봉이다.
내일보다는 오늘이 예쁘겠지?
골무처럼 작고 곶감처럼 속이 붉은 입술은
하늘의 반짇고리에서 나온 듯 아름다워서
구름 속 삼촌들도 '동백아가씨'를 따라 부른다.
오랜만에 모인 아버지의 어린 목젖들,
동백꽃 봉오리에 술을 따른다.

 

 

 

 

# 이정록 시인은 1964년 충남 홍성 출생으로 1989년 대전일보 신춘문예와 199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의자>, <정말>, <어머니학교>, <아버지학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의 목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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