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슬픔을 부르는 저녁 - 문신

마루안 2022. 7. 21. 21:30

 

 

슬픔을 부르는 저녁 - 문신

 

 

오늘 저녁은 낡은 상자를 내려놓듯, 다만 다소곳한 노래가 되어 세상에 주저앉는다

 

상자는 유월의 평상에 나앉은 사람처럼 선과 면의 각오로 저녁에 기대었고

건너편에서 까닭 모를 아픔처럼 어린 사과나무의 그늘이 침침해져 간다

 

그러니 상자에는 상자의 내력이

어둠에는 어둠의 내력이 있다는 사실을 누가 말해 줄 수 있을까?

슬픔에는 슬픔의 내력이 있다는 말을 누가

이 저녁, 캄캄해져 오는 바람의 찬란한 침묵처럼 노래할 수 있을까?

 

먼바다에서 저녁을 맞이하는 일처럼 우리의 상자는 그렇게 낡아 간다

바다라니

......

 

노래의 침묵처럼, 그 침묵에 벗어 놓은 신발처럼, 저녁이 가지런하게 건너올 때

그 주춤거리는 걸음을 마중하는 처마 끝 흐린 등불 같은 심정으로

캄캄한 슬픔이라고, 손에 닿는 대로

어둠의 뒷면에 꾹꾹 눌러 적는다

 

그런 저녁이면 담 너머에서 들려오는 악다구니들이 문득 서럽다

그 소리에 귀를 내어 주면서 자주 거친 무릎을 짚는 동안에도

 

바다에서는, 바다에서는, 바다에서는, 저녁이 저물어 온다

 

낡은 상자를 닮은 저녁이 낡아 가는 것을 보는 동안, 문득 슬픔의 모양으로 드리워 둔 손차양이 바르르 흔들리는 것은 격렬하다는 것,

저녁이 저녁으로 소멸해 가듯

슬픔이 슬픔으로 끝내 잦아들어 가는 것

 

어린 사과나무 쪽으로 침침해져 가는 사람들의 눈밑으로

낡은 상자가 그러하듯

그 안쪽에 세상의 잡동사니들을 껴안은 저녁이 저녁처럼 저물어 닿는다

 

상자에는 상자의 슬픔이 있고, 저녁에는 저녁의 슬픔이 있다는데

슬픔에는

상자가 낡아 가는 동안에도 저물 수 없는 캄캄해진 노래가 있다

 

 

*시집/ 죄를 짓고 싶은 저녁/ 걷는사람

 

 

 

 

 

 

어미가 밥을 안치는 저녁 - 문신

 

 

늙은 어미가 밥을 푼다

이혼하고 돌아와 말없이 먹는 밥은 뜨겁다

밥숟가락이 흰밥을 떠

약간 휜 허공을 날아 내 입속으로 들어오는 사이

흐린 텔레비젼에서는 밥숟가락 같은 혜성이 또 다른 허공을 날아간다

60년 만에 혜성은 지구를 지나간다

나는 한 생이 60년이면 충분한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어미는 이미 한 생에 또 한 생을 얼마쯤 덧살고 있고

이혼한 나는 한 생에 미치지 못했다

그 알량한 생이 궁금해

오늘 밤에는 혜성이 늙은 어미를 향해 달려오고 있다

 

어미가 밥을 안치는 저녁이 지나면, 늙을 일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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