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진짜 사나이 - 박수서

마루안 2022. 7. 11. 21:39

 

 

진짜 사나이 - 박수서

 

 

진짜 사나이가 되려나 봐

 

월화 드라마, 수목 드라마, 주말 연속극까지 꼼꼼하게 챙겨 보고 있어

극의 전개를 상상해 보거나, 방송 시간이 되면 대폿집에서 잔 놓고 집으로 들어오기도 해

탤런트 대사에 웃고, 욕하다가 때때로 고양이 눈망울로 뚝뚝 눈물도 흘려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 먹을 저녁 끼니는 머릿속으로 짜놓아야 해

돼지 앞다리를 찌개를 할까, 두루치기를 할까, 오징어를 볶을까, 문어는 좀 비싸니까

다음에 해 먹어야지 생각하다 조금 싼 닭똥집이나 껍데기를 볶는 날이 허다해

 

뼈 튼튼, 눈 맑은, 간 좋은, 전립선 힘쓰는, 폐 영양, 관절 팔팔, 장 콸콸, 피부 탱탱

건강기능식품은 거르는 날 없이 먹고 있어

사람이 어떻게 밥만 먹고 살아

 

거울을 바라보고 있으면 증기기관차 화차처럼 한숨이 나와

벌레 먹은 깻잎 같은 기미, 번데기 통조림에서 막 튀어나온 듯한 주름살, 축구공만 한 모공

활어도 아닌데 너무 싱싱해서 속상해, 막 슬퍼

이제 아내가 쓰는 토너와 미백, 주름 개선 크림을 바르고 일일팩도 하지

물론 일일병도 함께해야지 사나이니까

오늘 아침은 열흘 남짓 지나친 소맥으로 피똥을 쌌는데, 뭐가 더 중요한지 생각 없이

세면대에서 토닥토닥 크림을 바르며 새끼손가락으로 눈밑 주름살을 밀고 밀고 있었어

 

이제 진짜 사나이가 되었나 봐

 

 

*시집/ 내 심장에 선인장꽃이 피어서/ 문학과사람

 

 

 

 

 

 

구두약 - 박수서

 

 

아플 때 약 먹지

머리가 아파도 배가 아파도

하다못해 마음이 아파도 먹잖아

 

구두 닦아본 지 참 오래야

구둣방에서 구두를 맡겨 닦거나,

신발장에 기대 구두약으로 쓱싹쓱싹 윤내본 지 옛날

지금은 물티슈 몇 장 뽑아 닦아내고 바짓단으로 덮지

그런데 있잖아

얼굴 씻고 면도하고 로션 바르는 거

아파서 그러는 거 아니잖아

깔끔하게 보이려고 하는 일인데,

구두도 반짝반짝 멋지게 신으려 하는 일인데

왜 약을 바르는 거야, 빨간약도 아니고

윤기 좔좔 흐르는 흑마의 털처럼 검은 약을

 

있잖아, 구두는 가죽이 살이고 힘줄이야

구두약을 바르는 것은 윤이 나게 하는 것보다

가죽을 보호하려고 지키는 일이 먼저일 거야

우리 살면서 겉만 닦고 산적 많잖아

생각해 봐, 내 안을 얼마나 닦고 광내려 애썼는지

 

구둣방에 놓인 형형색색 구두들처럼

삶의 무늬는 저마다 다르지만, 다 구두점이 있어 살아 가잖아

쉼표처럼 쉬어가기도 그러다 마침표처럼 마치기도 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