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내 눈치도 좀 보고 살 걸 그랬다 - 이명선

마루안 2022. 7. 12. 21:48

 

 

내 눈치도 좀 보고 살 걸 그랬다 - 이명선


마음이 마음 같지 않아 천천히 병을 얻었다

생각날 때 밥을 먹고 너와 함께 골목을 걸어 봐도 내 골목은 끝으로 갈수록 말수가 적어졌다

아무 날엔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사랑을 이어 불렀지만 엄마의 딸이라 말 못 하는 헛꿈만 꾸곤 했다

나를 앞질러 가는 세상에 적의가 있었던 건 아니다

어림없는 이야기를 어림잡아 보려는 사람처럼 한 발 뒤로 물러나 나 같은 사람을 쳐다보았다 아무 날은 아무렇지 않길 바라며

겪지 말아야 할 일을 일찍 겪은 사람과 겪을 일을 먼저 겪은 사람에게도 남은 미래가 있어 나를 보면 조바심이 난다는 엄마의 말을 수긍하기로 했다

이 골목에 비가 그치면 반짝 낮더위가 시작되겠지만 늘 그렇게 무엇엔가 홀려 왔던 것처럼 나를 넘겨짚다가 골목의 끝과 마주한다

이럴 줄 알았으면 다른 눈치 말고 내 눈치나 좀 보고 살 걸 그랬다

 

 

*시집/ 다 끝난 것처럼 말하는 버릇/ 걷는사람

 

 

 

 

 

 

비수기 - 이명선


말귀는 어둡고 잠귀는 밝아

새벽빛이 가시지 않은 시각 맞은편 다니엘복지원 간판은 켜져 있었다 새벽 미사에 가는 노모의 뒷모습은 내가 쳐 놓은 철벽보다 더 고요해 편의점에서 작은 선인장을 샀다 물을 주지 않아도 선인장은 몇 달 하고도 며칠을 자라 줄 것이다 솜털 같은 잔가시가 나를 찌를 때까지

그날 헐렁한 속내를 내보인 건 나의 생활이 뒤돌아볼 여지를 주지 않아서였다

한번 생각해 봐 어느 순간 제대로 된 숨통을 쥐고 흔들 수 있는지

비수기에는 모든 발소리가 크게 들린다 모두 개소리야, 라고 말하는 순간 지나가는 빗소리로 맞아 본 적 있는지 묻고 싶었다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들만의 세상 앞으로 나를 데려다 놓을 수는 없었다 내가 변한다 해도 다가올 휴거와 노모의 기도는 우회하지 않는다는 가설에 성호를 긋자 슬픔이 만져졌다

지켜 온 종량대로 살다 보면 나의 휴거는 더 멀어질 것이다

 

 

 

 

# 이명선 시인은 충남 홍성 출생으로 2017년 <시현실>, 2018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다 끝난 것처럼 말하는 버릇>이 첫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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