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여름산 - 이기철

마루안 2022. 7. 5. 21:49

 

 

여름산 - 이기철 

 

 

골짜기를 잠가 버리면 구름은 어디로 흐를 거냐며 뻐꾹새가 운다

철쭉이 너무 붉으면 산이 불타 버릴까 봐 소쩍새가 운다

개울물이 내려오면서 자꾸 뒤를 돌아보는 것은 여름 볕이 눈부셔 어린 토끼가 길을 잃을까 걱정되기 때문이다

너무 조용하면 산이 강을 만나러 가 버릴까 봐 꿩의 목이 쉬고 그 소리에 낮잠 깬 도라지꽃이 보라색 저고리를 갈아입는다

아침 안개 산으로 올라가는 소릴 들으려고 노루가 장독 깨지는 소리로 운다

언제 오면 가장 반갑겠냐며 오동나무 아래서 라일락이 진다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 날이면 내가 손에 쥔 유리잔을 떨어뜨려 깬다

이것이 모두 여름날 정오에 일어나는 일들이다, 더 있지만 이만 쓴다

 

 

*시집/ 영원 아래서 잠시/ 민음사

 

 

 

 

 

 

7월 - 이기철

 

 

채송화가 혼자 무럭무럭 발전하고 있다

구름 알갱이들을 손바닥에 올려놓으면 짝을 이루는 나비 떼

그곳에 7월이 산다기에 홑옷을 입고 찾아간다

무럭무럭이라고 누가 큰 글씨로 팻말을 세워 놓은 걸 보면

나보다 먼저 7월을 밟고 간 사람 있다

계절이다, 그의 얼굴을 본 적이 있다

사소한 것들의 이름이 산의 키보다 장엄한 사방을 둘러보아도

아는 얼굴이라곤 찾을 수가 없다 다 익숙한데 모두 서툴다

멀고 가까이 무릎이 닿은 능선들

신생들의 숨소리로 정맥이 뛰는 저녁까지 걸어가서

불빛조차 푸른 밥상에 오이접시를 올려놓는다

휴식이 걸어와 천천히 수저를 든다

그곳에 7월이 산다기에 홑옷으로 갔다

노련한 저녁이 펴 놓은 광목 위에

7월은 없고 범람만 있다

 

 

 

 

# 이기철 시인은 1943년 경남 거창 출생으로 1972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청산행>, <열하를 향하여>, <지상에서 부르고 싶은 노래>, <유리의 나날>, <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아름다웠다>, <가장 따뜻한 책>, <흰 꽃 만지는 시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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