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톱달 - 심재휘
저녁볕을 옆으로 조금 밀어두고 그늘에 앉으면
마루 위의 그늘은 편지지를 깐 듯해서
편지를 쓰는 척 손톱을 깎습니다
당신을 떠나보내고 돌아온 그 달밤에도
빈방에서 손톱을 바싹 깎았습니다
오늘도 당신은 돌아오지 않으니 어느덧
보름이 지나고 나는 웃자란 손톱을 깎습니다
그리고 오늘 밤이 질 무렵은 그믐달이 뜰 차례
바싹 깎은 손톱으로 한동안 살은 시리겠습니다
그믐달같이 드러난 붉은 살은 차차 자라는
손톱 밑 어둠 속으로 들겠습니다
그믐은 조금씩 밝음으로 가겠습니다
오늘도 볕까지 튀어가지 못한 손톱들이
그늘에 삐뚤삐뚤 뭔가를 적는 것도 같았는데
그 편지는 잘 쓸어서 쓰레기통에 버렸습니다
그런데 어찌하겠습니까
자라는 손톱을 깎을수록 나의 달은 차지 못하여
당신이 돌아오는 길은 어둠에 묻힙니다
*시집/ 그래요 그러니까 우리 강릉으로 가요/ 창비
흉터 - 심재휘
여름 저녁에 발을 씻다가
정강이의 흉터를 만진다
초사흘 달 모양의 칼을 몸에 새겼다
지난 봄날 누군가와 부딪쳐 얻은 상처였는데
찔리거나 베이거나 혹은 눈이 매웠던
그러니까 상처란 모름지기 흉터란
찢어지고 짓물러도 그깟 사연쯤이야 하던 시절의 것
어린 시절에 모은 흠집들이 몸에 터를 잡고 산다
피를 흘리며 소리치면
놀라서 뛰어오던 가련한 어머니의 집
한데, 요즘은, 부딪침은, 상처는
왜 흉이 되나?
쉬 아물지를 않나?
지난 봄날에 얻은 칼 모양 흉터를 어루만진다
초사흘 달이 지지 않고 하늘에 오래 떠 있다
# 심재휘 시인은 1963년 강원도 강릉 출생으로 1997년 <작가세계>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적당히 쓸쓸하게 바람 부는>, <그늘>, <중국인 맹인 안마사>, <용서를 배울 만한 시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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