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장마철 - 최백규

마루안 2022. 6. 28. 22:29

 

 

장마철 - 최백규

 

 

정학과 실직을 동시에 치르고도 여름은 온다

 

터진 수도관에서 녹물이 흐르고 장롱 뒤 도배된 신문지로 곰팡이가 번지다 못해 썩어들어간다 기름때 찌든 환풍기를 아무리 틀어도 습기가 자욱하다

 

깨진 유리병 옆에 버려둔 감자마저 싹을 흘리고 있다 벌겋게 익은 등 근육 위로 욕설을 할퀴고 가슴팍에 고개를 파묻다가

마주 보던 사람이 떠올라서

 

밀린 급여라도 받기 위해 진종일 공사판 주변을 어슬렁거린다 전신주에 기대앉아 신발 밑창으로 흙바닥의 침을 짓이기고 불씨 죽은 드럼통이나 해진 목장갑만 물끄러미 들여다보기도 한다

 

숨이 차도록

구름이 낮다

 

신입생 시절 교정에 벽보를 바르던 선배들은 하나같이 폭우를 맞은 표정이었다 화난 얼굴로 외치는 시대와 사랑이 고깃집이나 당구장에 널려 있었고 나는 무단횡단할 때보다 용기가 없었다

후미진 신록 아래 돌아가는 전축에서 이 지상에 없는 청년이 무심히 젊음을 노래하는데 장송곡을 닮은 우리에게

 

여름 바람이 불어와 여름을 실어 가고 있었다

 

이제 홀로 뒷골목에 남아 뜨거운 눈물을 훔치며

왜 비가 그쳐도 우리의 장마철은 도무지 끝나지 않는가 중얼거리며

 

멍하니 올려다본다

 

빚을 남긴 동창의 부음을 들은 것처럼, 낙향한 주검을 눕혀두고 어색하게 염을 지키던 친구들처럼, 흰 봉투와 갈라 터진 입술의 피와 편육 그리고 아스팔트 위 꺼뜨린 담뱃불처럼

 

연풍에도 쉬이 스러지는 밤 그늘이었다

 

너무 오래 비가 왔다

 

 

*시집/ 네가 울어서 꽃은 진다/ 창비

 

 

 

 

 

 

너의 18번째 여름을 축하해 - 최백규


키스를 하면 멀리서 누군가 죽어간다는 말이 좋았다

멸종에서 살아남았다는 것은
인간이 만든 공원 구석에서 인간을 경계하는 짐승들의 밤
목과 귀를 핥으면 모든 하루가 무사해지는
나는 신이 만든 세상에 있다

너의 우주와
밤의 빛이 공전으로 맞물려 회전하고 있다면
자전은 입술의 방향계일까

숨을 참아도 돌아오지 않는 과거가 있고
현재의 미래와
미래의 현재가
같은 몽타주 위에 멈추는 것처럼, 흰 꽃과 검은 옷으로
붉어지는 혀는 없다

문득, 지구가 몸속에서 또 심장을 밀어내었다

지평시차로 멀어질 때마다
전세계 성당은 천국으로 부서진 구조 신호를 보내고
신은 인간을 듣지 못한 척한다

우리는 옥상에서 젖은 몸속으로 무덤 냄새가 추락할 때까지 서로의 빛을 마시며
십자가를 태워 올렸다

너무 아름다워서 이대로 죽어도 좋겠다고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