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공부 - 문신
감나무 잎에 빗줄기 들이치는 것 지켜보다가 낡은 서가에서 책 꺼내 오는 일을 잊었다
빗소리 차근차근한 저녁에 공부하는 일은 애당초 틀려먹은 일
차라리 행인처럼 낯설게 두리번거리는 저녁을 공부하기로 한다
저녁은 본문 사이에 낀 인용문처럼 다소는 어색하게 굴기로 작정한 모양으로 스멀거리고
이마를 들면 꼭 누군가를 만나지 않고는 지나칠 수 없는 길목에 저녁이 걸려 있다
이런 저녁이면 어른들은 술동무를 찾아 끄덕끄덕 빗줄기를 헤집어대었다고 들었다
그러나 발목까지 젖어드는 저녁에 저녁을 공부하는 일은
저 감나무 앞에 나는 누구인가, 라는 문장을 캄캄하게 옮겨 적는 일
그런 뒤 비 그친 감나무 잎 그늘에 낡은 의자를 내다 놓고 또 나는 누구인가, 라는 캄캄한 문장을 팔팔 끓는 목청으로 읊어대는 일
그런다고 저녁이 거저 스미지는 않을 터, 연필을 쥐었던 중지의 굳은살을 깎아낸다
이 버려지는 살에게서 더 이상 피도 눈물도 찾아볼 수 없는 것처럼, 감나무 잎에 저녁이 내린다
저녁에 저녁을 공부하는 흐린 생이 여기 있었다는 듯 감나무 잎이 까맣게 젖어 있다
*시집/ 죄를 짓고 싶은 저녁/ 걷는사람
늦은 저녁때 오는 비 - 문신
싸리나무가 꼿꼿이 일어서면 저녁이다
이런 날 바람은 참 건들거리고 조그마한 새들도 풀숲에 들어 기척이 없다
비가 내리는 것이다
늦은 저녁때 오는 비를 긋는 일은 저녁밥이 푸르스름하게 식어 가는 일
물끄러미 비 오는 저편을 향해 눈매를 가늘게 당겨
저물어 가는 속도로 성큼 앞 산자락을 끌어오는 일인데
비는 그 사이를 투명한 짐승처럼 바람을 몰아 후드득 흩뿌려 놓고는
또 저렇게 싸리나무를 가만히 내려다보는 것이다
싸리나무에 저녁을
안치고
늦게 귀가하는 얇은 우산들을 향해 전속력으로 충돌하는
비
비
비
비
비를 겨누어 직립으로 곤두서는 싸리나무의 저녁때
*시인의 말
"나의 영혼은 오래전부터
무르익어, 신비에 흐려진 채
무너져 내린다."라고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는 썼다.
내가 침몰했던 모든 저녁은
무르익어 무너진 영혼의 잔해였음에
틀림없다.
이것은 내 생각이다.
그리하여 내내
저녁의 시를 쓸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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