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저녁 공부 - 문신

마루안 2022. 6. 5. 19:45

 

 

저녁 공부 - 문신

 

 

감나무 잎에 빗줄기 들이치는 것 지켜보다가 낡은 서가에서 책 꺼내 오는 일을 잊었다

 

빗소리 차근차근한 저녁에 공부하는 일은 애당초 틀려먹은 일

 

차라리 행인처럼 낯설게 두리번거리는 저녁을 공부하기로 한다

 

저녁은 본문 사이에 낀 인용문처럼 다소는 어색하게 굴기로 작정한 모양으로 스멀거리고

 

이마를 들면 꼭 누군가를 만나지 않고는 지나칠 수 없는 길목에 저녁이 걸려 있다

 

이런 저녁이면 어른들은 술동무를 찾아 끄덕끄덕 빗줄기를 헤집어대었다고 들었다

 

그러나 발목까지 젖어드는 저녁에 저녁을 공부하는 일은

 

저 감나무 앞에 나는 누구인가, 라는 문장을 캄캄하게 옮겨 적는 일

 

그런 뒤 비 그친 감나무 잎 그늘에 낡은 의자를 내다 놓고 또 나는 누구인가, 라는 캄캄한 문장을 팔팔 끓는 목청으로 읊어대는 일

 

그런다고 저녁이 거저 스미지는 않을 터, 연필을 쥐었던 중지의 굳은살을 깎아낸다

 

이 버려지는 살에게서 더 이상 피도 눈물도 찾아볼 수 없는 것처럼, 감나무 잎에 저녁이 내린다

 

저녁에 저녁을 공부하는 흐린 생이 여기 있었다는 듯 감나무 잎이 까맣게 젖어 있다

 

 

*시집/ 죄를 짓고 싶은 저녁/ 걷는사람

 

 

 

 

 

 

늦은 저녁때 오는 비 - 문신

 

 

싸리나무가 꼿꼿이 일어서면 저녁이다

이런 날 바람은 참 건들거리고 조그마한 새들도 풀숲에 들어 기척이 없다

비가 내리는 것이다

늦은 저녁때 오는 비를 긋는 일은 저녁밥이 푸르스름하게 식어 가는 일

물끄러미 비 오는 저편을 향해 눈매를 가늘게 당겨

저물어 가는 속도로 성큼 앞 산자락을 끌어오는 일인데

비는 그 사이를 투명한 짐승처럼 바람을 몰아 후드득 흩뿌려 놓고는

또 저렇게 싸리나무를 가만히 내려다보는 것이다

 

싸리나무에 저녁을

안치고

늦게 귀가하는 얇은 우산들을 향해 전속력으로 충돌하는

비를 겨누어 직립으로 곤두서는 싸리나무의 저녁때

 

 

 

 

*시인의 말

 

"나의 영혼은 오래전부터

무르익어, 신비에 흐려진 채

무너져 내린다."라고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는 썼다.

 

내가 침몰했던 모든 저녁은

무르익어 무너진 영혼의 잔해였음에

틀림없다.

 

이것은 내 생각이다.

그리하여 내내

저녁의 시를 쓸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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