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사진 속에서 몽글몽글 부풀어 오르는 - 김륭

마루안 2022. 5. 28. 22:00

 

 

사진 속에서 몽글몽글 부풀어 오르는 - 김륭

 

 

찰칵, 한순간이다, 한 번 갇히면

도망갈 수 없다. 백 년이 가고 천 년이 가도

아이처럼 해맑아서 무덤 속으로도

발을 내릴 수 없다

 

도라지꽃밭 같았다 얼굴을 마주 보면서도 보이지 않는다고

밤을 당신의 발처럼 만질 수 있는 곳. 모든 세상이

거짓말 같아서, 도라지꽃이 필 때도 도라지꽃이 질 때도

사람은 사람을 끝내 고쳐 쓸 수 없어서

 

사진 속에서 희멀겋게 웃고 있는 당신을 꺼내

발톱을 깎아 준다. 오늘은 내가

좀 착해진 것 같다.

 

느닷없이

 

이 형용사는 살 같다. 그래서 당신은 웃고 나는 울고

기억이란 다시는 오지 않을 사람의 뼈, 그러니까 촉망받는

주검들의 이야기.

 

당신 덕분이라고 쓸 수 있다. 언제부터 내 사랑은

골동품 상점의 고문서가 되어 버렸을까.

 

아버지, 떠난 적도 없고 떠나보낸 적도 없는 없는 당신으로부터

바람이 오고 또 밤입니다. 그래 그 여름을 끓이던

밤의 비알.

 

죽음으로 끓이던 생의 한순간을

고백하기 위해 당신은 사진 속에 문을 닫고

앉아 부풀어 오른다.

 

죽음마저 곁에 둘 수 없는

사람의 두 눈은 신(神)을 아기처럼 업은

밤의 독서로도 끝내

감길 수 없다.

 

 

*시집/ 나의 머랭 선생님/ 시인의 일요일

 

 

 

 

 

 

잠적 - 김륭

 

 

기분 좋게 출발하는 중이야

안녕, 이란 말 대신 휘파람
단 한 번도 누군가를 기다려 본 적 없는 바람 불어오고
그 바람도 모르는 사람이 나타나 보여 주는
모란앵무 데리고

못다 부른 노래마저 들킬까 봐 숨어서
다시 공부하고 직장을 구하고 결혼도 하고
딸 하나쯤 낳고 살다가, 깜빡
죽는 것도 잊어버릴


미안해, 더 이상 찾지 마

나, 지금 당신 안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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