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끝에서 첫 번째 - 박은영

마루안 2022. 5. 26. 21:30

 

 

끝에서 첫 번째 - 박은영

 

 

세상의 쓴맛은

한밤중 더듬어 찾은 젖꼭지로부터다

 

젖을 떼기 위해 발라 놓은 마이신을 맛본 뒤 일찍이 우는 법을 터득하고 손가락을 빨았다 허기의 힘으로 마루 끝을 벗어나 극을 향해 신발코를 찧어 대며 대문을 나서니 딴 세상이었다 손끝으로 담배를 쥐고 피우는 패거리들과 용두사미가 되어 몰려다닌 시장, 귀퉁이에서 꼬리지느러미를 칼날로 내리치는 여자가 엄마라는 사실이 부끄러웠던 나는 세상을 끝장내고 싶었다 용의 꼬리로 사느니 뱀의 머리가 되리라 연필심을 깎으며 코피를 쏟았다

 

허공의 멱을 따는 칼끝과 가난한 꽁무니를 따라 걷다 보면 소주, 변리, 씀바귀, 이별,,,,, 끝에서 첫 번째 골목이 나오곤 했지만 나는 마이신보다 쓴맛은 찾지 못했다

 

죽을 만큼 쓰디쓴 그 끄트머리에서

꽃은 피고,

이런 쓸개 빠진 놈이라는 소리가

코끝을 물들였다

 

 

*시집/ 우리의 피는 얇아서/ 시인의일요일

 

 

 

 

 

 

귀소본능 - 박은영


종로 낙원상가, 비둘기들이 땅으로 내려왔다

 

새의 낙원은

하늘이 아니라 종로구이다

 

아이의 손을 잡고 집을 나왔을 때, 정류장 앞에서 동공은 흔들리고 옷자락은 세차게 퍼덕거렸다 하필, 여름이었고 아이가 복숭아 맛 하드를 사 달라며 보채니 세상이 막막했다 양푼에 찬밥을 퍼 담아 열무김치와 고추장을 넣고 쓱쓱 비벼 먹을 수 있는 골목으로 돌아간 것은 본능이었다 날갯죽지가 뻐근하도록 얻어 맞은 비만한 몸을 이끌고 낙원의 중심으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조율되지 않은 말들이 새어 나왔다


이년의 팔자가 이 모양 이 꼴인 게지

 

눈을 부릅뜨고 허기를 달랜 나는

발목에 파스를 붙였다

팔자걸음을 걷는 음표들
비둘기가 낙원을 떠나지 못하는 까닭은

무거운 발목 탓일지도 모른다
전깃줄이 오선지처럼 늘어진 하늘은
도돌이표로 연주되고

먼 길, 돌아온 자리가 후끈거리는 것이었다

 

 

 

# 박은영 시인은 2018년 <문화일보>와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구름은 울 준비가 되었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