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빛도 없이 낡아 가며 흐르는 몸 - 김명기

마루안 2022. 5. 21. 22:37

 

 

빛도 없이 낡아 가며 흐르는 몸 - 김명기

 

 

야적장 철근을 옮긴다

이것도 한때는 흐르는 물이었을 거라

먼 시간 저도 모르게 흘러와 쌓이고 굳었지만

물결이었을 때를 기억하느라 휘청거린다

 

현장에선 고요한 명산은 필요 없다

쓰임새에 맞으면 죽어서도 살아 있다

산 자의 근육처럼 일렁이는 철근 그림자

 

장비에 얹히는 철근 무게가 늘어날 때마다

나도 모르게 자꾸만 허리 굽히며 겸손해진다

탄력과 반동에 익숙해진 습성

마치 저 무거운 것을 등에 지고

한없이 어디론가 흘러가야만 할 것 같다

 

세상에 없는 사람들이 남기고 간 것은

대체로 패배나 열등이다

자본주의 장점은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흘려보내는 것이다

반나절 휘청거리는 철근 몇 다발 옮겼을 뿐인데

한생이 다 흐른 듯 마음이 헐거워진다

 

 

*시집/ 돌아갈 곳 없는 사람처럼 서 있었다/ 걷는사람

 

 

 

 

 

 

목수 - 김명기

 

 

못 주머니를 찬 사람이 떨어졌다

낮달과 해 사이 그가 쳐대던 못처럼 박혔다

점심을 나와 함께 먹었던 사람

맞물리지 않은 비계에 발을 헛딛고

허공에서 바닥으로 느닷없이 떨어졌다

짧은 절명의 순간에도 살겠다고 발버둥쳤지만

안전모가 튕겨져 나가고 박히지 않은 못이 먼저 쏟아졌다

세상 한 귀퉁이에서 이름 없이도 살아 보겠다고

낡은 안전화를 끌고 날마다 비계를 오르던

늙은 목수가 남긴 유산이라곤 허름한 못 주머니와

상처투성이인 안전모와 조악한 싸구려 안전화가 전부였다

자기 전부를 걸고 일하는 사람은 마지막까지 필사적이다

사람들이 몰려들고 구급차가 달려올 때 마디 굵은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일어서려던 사람이 끝내 숨을 거두고

현장은 서둘러 정리되었다 장국에 만 밥을

크게 한술 뜨며 했던 그의 말이 자꾸만 거슬렸다

못질할 때 말이여 첫 대가리만 때려 보면 알어

단박에 들어갈 놈인지 굽어져 뽑혀 나올 놈인지

낮달과 해 사이 박혀 버린 그는 어떤 못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