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사근진 - 심재휘

마루안 2022. 5. 15. 21:18

 

 

사근진 - 심재휘


오래전에 철거된 무허가 소주집은

경포 해변의 끝이었다
이름이 없고 사방이 유리창이어서 그냥 유리집이었다
한뼘 더 변두리인 사근진이 잘 보였다

경포에서 북쪽으로 지척인 사근진은

불 속에 침묵을 넣고 그릇을 만든다는 사기 장수의 나무
여름 해변의 가장자리에 놓여 경포도 아니고 그 너머도 아닌
가을의 변방


이를 테면,

추워져서 우리는 유리집에서 소주를 마셨던 것인데

할 말이 없어지면 겨울 사근진은 파도 소리를 데리고

유리집에 조금 더 가까이 왔다

 

유리집이 사라져도

사근진은 남아

사근진이 없다면 말없이

조금 먼 곳을 바라볼 경포도 없을 것이다

 

 

*시집/ 그래요 그러니까 우리 강릉으로 가요/ 창비

 

 

 

 

 

 

어떤 면접 - 심재휘

 

 

두명의 입학사정관 앞에 혼자 앉은 그는

문경에서 어제 저녁차로 올라왔다 한다

서울에는 아는 사람이 없어서

동서울터미널에서 시월의 낯선 밤을 새우고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고 왔다 한다

눈빛이 말처럼 더듬거리는 고3 졸업반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하면 요양원들을 다니면서

집 나간 아버지를 찾겠단다

터미널 긴 의자에 앉아 면접을 준비하던 지난밤

생활기록부와 자기소개서와 가족증명서를 읽으며

어릴 때 헤어진 엄마가 오래전에 죽었다는 사실을

열아홉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한다

국영수보다 어려운 가족이라는 과목의 등급은

생활기록부에도 없어서

가늘게 떠는 목소리에 몇점을 주어야 하나

일찍이 그의 전재산이 되어버린 난감의 표정은

가필할 수가 없고 지울 수도 없는 개근의 무늬

동공에 길게 고여 있는 자기소개서의 필체

튿어진 바지 밑단 아래 드러난 그의 맨 발목이

젖은 걸음으로 또박또박 써야 했던 지원 동기이고

앞으로도 계속해야 하는 필생의 학업 계획인데

푸르스름한 전등 불빛 아래 질문도 대답도 머뭇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