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봄밤의 일기 - 박위훈

마루안 2022. 5. 15. 21:08

 

 

봄밤의 일기 - 박위훈

 

 

세상의 귀란 귀는 다 닫아걸고

나를 들어줄 눈은 먼데다 두고 왔다

이를테면, 귀를 자른 어느 화가의 헐은 생애 같았지만

아무도 간섭할 수 없는 공중의 일 같은 거였다

 

보릿대 총총 푸른 불을 켜고

바람벽은 높고 높아 헛발질로도 닿을 수 없는

너와의 보이지 않는 불신의 간격처럼

거기, 다가설 수 없는 친연의 거리

갈대들이 서로 몸 비벼 겨울을 건너듯

뻐꾸기도 제 울음 한껏 불어재꼈던 그때

 

애끓는 탁란의 일기가 숲의 문장을 완성해 간다

 

구름의 등에 올라야 비의 내력을 알 수 있듯

바지게가 흘리는 달빛 몇 줌이 어둠을 품었던 것처럼

울음을 삼키며 천형의 날들을 견뎌야 했다

근본보다 중요한 것은 살아남는 일

 

누가 저 애면글면한 풍경에 혀를 차도

다만, 어미의 어미의 길을 좇을 뿐

 

떡국, 풀국, 박국도 다 울음이어라

마른기침이 보리까끄라기처럼 버석거리던

보리누름께 당신

곤비의 숨이 내내 홧홧했다

 

 

*시집/ 왜 그리운 것들만 더디 바래지는지/ 상상인

 

 

 

 

 

 

그 붉음에 대하여 - 박위훈

 

 

내내 겨울이었어요

가령 저 점점의 궤적이 잊혀가는 계절의 상처라면

당신은 읽히지 않는 타인일지도 모릅니다

 

고추 땡볕에 그을린 하루가 천천히 저물 때

저녁의 문장을 운판에 새긴 되새 무리가 숲을 닫을 때

냉기 스며드는 무릎에 기대는 한숨

혹은 혼자라는 말

 

똬리 튼 청승이 혼자라는 걸 부정하네요

누군가의 그리움을 대신 앓는 바람은

왜 가난하고 외롭고 쓸쓸한* 곳만 찾아드는지

 

남겨진 적막이 우울의 수위를 끌어올려요

 

큰 개의 짖음이 은하에 닿을 때까지 백 년

삭이 삭을 지날 때마다 시리우스의 호흡이 가빠집니다

삭힌 울음은 독종이 된 지 오랜데

낮은 기도는 언제쯤 당신에게 가닿을는지요

 

가시 돋친 당신의 말이 빙점의 한복판을 지나는 동안

얼어붙은 못물이 제 결을 풀긴 풀까요

 

쌓인 적막을 구기자 찻물에 우리면 센머리 검어져

그 봄 다시 올 것 같아

오종종 삼동을 쇠는

저 붉은

 

 

*백석 - '흰 바람벽 있어' 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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