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봄밤 - 김정미

마루안 2022. 4. 29. 22:37

 

 

봄밤 - 김정미


까마귀 부리는 그날 운세였다
환풍기 날개 깊숙이 붉은 패를 밀어 넣고
아랑곳하지 않는 제발과 잠시

불타버렸다

 

불탄 순간은 홀로 어두워지다 얼룩을 남기며

깊어지는 중이었다

죽은 새를 죽은 패로 자꾸만 잘못 발음했다

 

비 맞은 날이면 점괘에 젖지 않는 오늘을

두꺼운 전집으로 갖고 싶었다

무너진 바닥을 믿지 않는 편이어서

고요한 모서리들은

손에서 미끄러지다 고딕의 자세를 놓치곤 했다

그을린 멈춘 새를 마지막까지 열지 않았다

 

퉁퉁 불은 손금을 물고 오는 부리를 오독할 때마다

뒤집어진 밑장 하나 본 것도 같다

검은 싸리나무를 건너오는

내 안에 나를 만날 때마다

검은 재가 자꾸 묻어 있었다

 

울면 아무래도 나쁜 패를 손에 쥐는 일이어서

조용하게 밥을 지었다

죽은 쥐를 끌고 가는 그림자를 보았다

 

나를 응시하는 눈,

저 적의 가득한 눈동자를 어디서 보았을까

모른 척하고 싶었지만 모른 척할 수 없는

봄밤이었다

 

 

*시집/ 그 슬픔을 어떻게 모른 체해/ 상상인

 

 

 

 

 

 

사월이 지나면 - 김정미

 

 

한 대의 버스가 지나가고 구름이

지나가고

사월이 소 떼처럼 지나가고

내가 나를 못 본 체

오래오래 지나갈 때

 

가방에 넣어두었던 연두의 계절이

귀를 짤랑거리며 떠도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뒷걸음에 밟힌 풀잎의 덜컹거림과

빚어놓은 날개가 부서지는 꿈과

너를 넘치는 사월을

 

문득

길 건너에서 나를 돌아보는

 

사월을

 

 

 

 

*시인의 말

 

간절해지는 목록이 하나둘 많아질수록
봄을 기다리는 날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제 알 것도 같다.
봄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봄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내 삶에 부는 바람의 긴 꼬리를
자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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