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불면 1 - 한명희

마루안 2022. 4. 25. 19:21

 

 

불면 1 - 한명희

-난간

 

 

난간 위에 서 있던 어젯밤

길가에 습관처럼 서 있던 당신은 택시 기사와 드잡이한다

갑자기 사라진 어느 집을 두고

 

잠 못 들던 어젯밤과 무관하게

먹은 것도 없이 배가 부르다던 누구와도 무관하게

 

머리채를 잡고 흔들던 바람은 바람끼리

서로의 몸을 비틀고 매만져 장송곡 같은 저음의 노래를 만들고

 

흙빛이 된 하늘과

핏줄을 드러낸 나무는 난간보다 낮은 집에 팔을 뻗고

회초리를 든다

 

허물어진 집을 다시 짓거나 일으켜 세우기 위해

밤을 달리는 사람들이 당신만은 아니었으므로

 

당신을 지나쳐 온 집들과 앞서간 집들은 여전히 속도를 무시하고

눈을 보면 불쑥불쑥 솟아 있는 빌딩처럼

 

이 층으로 가는 난간에 기대 있다 뒤처져 마음만 앞서 오르는 나는

캄캄한 오밤중, 밤새 대궐 같은 집을 혼자 짓다

부수고

 

먹은 것도 없이 배가 부르다던 누군가의 난간이 되어 있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길가에 영혼을 빼앗긴 듯

우두커니 서 있다

 

갑자기 사라진 집을 두고

 

 

*시집/ 아껴 둔 잠 / 천년의시작

 

 

 

 

 

 

불면 3 - 한명희

-번아웃증후군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버지가 불춤을 추고 계셨다

 

진화 안 된 몽골리안처럼 눈에 불을 지피고 사람들의 간을 꺼내 먹다

 

샴페인을 터뜨리던 사장님과 셀 수도 없이 많은 사모님들이

관중석에 앉아 아이들과 환호작약하는 때였다

 

불붙은 경마장에서 살려 달라는 친구와 동료들을 트랙 안으로 밀어 넣고

 

온몸 피투성이가 된 나는 새롭게 태어나고 싶어

발에도 해가 뜨는 구두를 사 신고

 

카지노가 있는 워커힐과 이태원을 전전하다

곁에 있는 엄마를 찾고 있다

 

망아지 같은 새끼 둘과 한 여자가 생각나서

 

채찍을 든 비가 불 꺼진 사무실 창문을 거칠게 두드릴 때였을 것이다

 

지나가던 마주가 트랙에 주저앉아 있다

투덜거리는 말에 당근을 물릴 때였던가?

 

불난 집에 기름을 붓고 부채질을 하던 친구와 친구의 아버지였던가

 

 

 

 

*시인의 말

 

눈을 비비고 다시 또 비벼 봐도 캄캄한 눈으로

사는 내내 겨울 없이 풍성했던 거짓말에도 살아 준 세상과

타협할 줄 모르던 핏줄이 새삼 감사한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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