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할 자격 - 김륭
쌀을 씻어 안치다, 문득
고양이 밥부터 챙긴다 이럴 땐 나도 발이
네 개인 것처럼
착하다
작은 밥그릇 앞에서
한순간 세상의 전부가 된 밥그릇 하나를 지키기 위해서
밥그릇 속에 머리부터 집어넣고서는
굳건하다 아기 고양이, 아기를 버티는 있는
네 개의 발
새가 온다, 나비가 온다, 발을 가지러 아기를 가지러
운 좋은 날이면
귀뚜라미를 톡톡 두드려 울음을 꺼내듯 한 생을
건너
밥그릇이다, 하나뿐인 밥그릇 하나를 지키기 위해
버티고 선 저, 네 개의 발은 잘려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부장(副葬)이다
죽어서도 뛸 수 있는 심장의 상상력이다
당신을 기다리는 일이
그랬다
*시집/ 나의 머랭 선생님/ 시인의 일요일
나는 이 이야기를 나의 머랭 선생님에게 해 주었다 - 김륭
좀 많이 늦었지만
결혼을 한 번 해야 할 것 같은
여자를 만났다
기뻤다 운명 같아서, 이 운명이
지옥과 천국을 자주 오가다 길을 잃어버릴 때까지만
살자, 한 번 더 기뻤다
내 꿈은 머랭, 닭과 무슨 관계가 있을 것 같아서
머쓱하게 웃었다 여자가 따라 웃었다
설탕과 달걀흰자는 많이 친할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해 주고 싶었지만
좀 민망했다
그녀는 웃음을 목에 걸고 다니는 것 같고
나는 웃는 얼굴을 만져 본 적이 없다
손만 잡고라도 잤으면 한다
잠깐 실례할게요
나는 그녀의 하얗고 가느다란 목을 잘라
호주머니에 넣는다
화장실 거울 앞에서
닭이 된 나는 그녀의 웃음을 빈 호리병처럼 기울여서
나의 친애하는 머랭 선생님을 소개시켜 주기
참 좋은 날씨라고
생각했다
# 김륭 시인은 경남 진주 출생으로 2007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시, 강원일보 신춘문예에 동시가 당선되었다. 시집으로 <살구나무에 살구비누 열리고>, < 원숭이의 원숭이>, <애인에게 줬다가 뺏은 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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