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행복 - 심재휘

마루안 2022. 4. 21. 21:37

 

 

행복 - 심재휘


집을 나서는 아들에게
보람찬 하루라고 말했다


창밖은 봄볕이 묽도록 맑고
그 속으로 피어오르는 삼월처럼 흔들리며
가물거리며 멀어지는 젊음에 대고
아니다 아니다 후회했다


매일이 보람차다면
힘겨워 살 수 있나


행복도 무거워질 때 있으니


맹물 마시듯
의미 없는 날도 있어야지
잘 살려고 애쓰지 않은 날도 있어야지


*시집/ 그래요 그러니까 우리 강릉으로 가요/ 창비

 

 

 

 

 

 

신발 모양 어둠 - 심재휘

 

 

끈이 서로 묶인 운동화 한켤레가 전깃줄에
높이 걸려 있다 오래 바람에 흔들린 듯하다
어느 저녁에 울면서 맨발로 집으로 돌아간
키 작은 아이가 있었으리라
허공의 신발이야 어린 날의 추억이라고 치자
구두를 신어도 맨발 같던 저녁은
울음을 참으며 집으로 돌아가던 구부정한 저녁은
당신에게 왜 추억이 되지 않나

오늘은 짙은 노을이 당신의 발을 감싸는 하루
그리고 하루쯤 더 살아보라고 걸음 앞에

신발 모양의 두툼한 어둠이 내린다

 

 

 

 

# 심재휘 시인은 1963년 강원도 강릉 출생으로 1997년 <작가세계>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적당히 쓸쓸하게 바람 부는>, <그늘>, <중국인 맹인 안마사>, <용서를 배울 만한 시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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