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꽃의 속도 - 복효근

마루안 2022. 4. 17. 19:33

 

 

꽃의 속도 - 복효근

 

 

주걱모양 조각도처럼 꽃잎이 허공을 조금씩 파고 있다

파인 허공 미세한 가루로 흩어져 날리지만

너무 고와서 나비의 눈을 가리지 않는다

빽빽한 공기가 파여 나가고

빛 조각 분분하다

부서진 빛 가루를 제 몸에 갖다 붙이며 꽃잎이 자란다

조각도가 허공을 파는 소리를 한순간에 몰아놓으면 천둥소리가 날 것이므로

그러면 수많은 벌이 길을 잃을 것이므로

달이 채워지는 속도로

제 몸에 딱 맞는 크기의 허공에 꽃은 꽃을 채워놓는다

저마다 속도를 맞추는 별이 달라서

어떤 꽃은 안드로메다의 별에 제 눈을 맞춰두고 핀다

그리고 다시

잠시 빌렸던 허공을 허공으로 채워놓기 위해

햇빛에게 빌린 것 햇빛에게

어둠에 빚진 것 어둠에게 돌려준다

다녀가는 나비가 발을 헛디디지 않게

그 자리를 메꾸는 소리에 아무도 놀라지 않게

달이 비워지는 속도로

왔던 길 간다

어느 별이 저를 채우고 비우는 딱 그 속도로

 

 

*시집/ 예를 들어 무당거미/ 현대시학사

 

 

 

 

 

 

무화과 - 복효근


그에게 꽃이 없다 말하지 말자
꽃은 주머니에 넣어서 옆구리에 차고 있다
이름하여 화낭(花囊)

꽃 피고
꽃 지는 덧없는 길 위에서
질정 없이 흔들리는 마음
피고 짐을 요약하여 한 주머니에 넣어 두었다 

화낭이 익으면 과낭(果囊)
어미 짐승의 젓꼭지를 닮았다
몸속엔 피 대신 우유같이 하얀 유액이 흘러
사막을 헤매는 낙타의 목마른 울음소리 들리는 날이면
유선이 부풀어서
세상 모든 아이들, 아이 같은 이들에게 젖 먹이고 싶었을까 

신은 분명 모성이었을 것
폭염의 언덕에 서서
걸어서 사막을 건너는 이들을 부르는 듯
작은 바람에도 흔드는 손
푸른 잎맥이 지문처럼 새겨져 있다 

꽃도 아니고 열매도 아닌
꽃이면서 열매인
그것밖에는 아무것도 없고
이윽고는 그것마저 없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