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복권을 사라고 했다 - 류흔
어떻게든 견뎌야 한다.
꼬박 오십팔 년하고
삼 개월 그래왔듯
앞으로도 살아야 한다.
깨진 유리조각처럼
뾰족한 슬픔이나
나의 면모가 상세히 기록된 플라스틱 칩 따위 와작
와작 씹어 삼키며
현장에 가야 한다.
그간의 나는
끈질긴 나의 용의자,
누군가에게 추적을 당했다면
범인은 나 자신이다.
고통 없이 잘 찔리기 위해
날을 벼려왔다.
원하는 국면이 찾아오기를
소원하며 살아왔으니
나의 천적이 나일밖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더구나 익지 않은 술을 은밀한 어디에 묻어두었는지
친구에게 가리켜주지 않은 채
나는 죽었다, 어제 밤
야하고 아리따운 꿈속에서.
깜짝 놀라 허둥대면서도 기척 내지 않으려고
아주 멀리 있는 아버지와 가까이 있는
어머니와 다른 방에 잠든 가족을 위해
죽음보다 낮게 숨을 참았다.
*시집/ 지금은 애인들을 발표할 때/ 달아실
인생 - 류흔
느리고 기인 일생(一生)
죽기 직전에야 안다 인생은
짧다는 것을.
미래에서 생각하면
몇 가지 추억,
바람의 낱낱에 실린
가벼운 냄새들.
지금 생각하니 적(敵)이 있었고
적이 없었다.
적이 없었다는 고백은
그런 적(的)이 없다는 의견일 듯,
기일고 느린
일생,
언젠가는 나의 무덤이 될 게 뻔한
명백한 인생.
# 류흔 시인은 1964년 경북 안동 출생으로 2009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금을 받아 2011년 시집 <꽃의 배후>를 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지금은 애인들을 발표할 때>가 두 번째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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