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친구가 복권을 사라고 했다 - 류흔

마루안 2022. 4. 14. 22:10

 

 

친구가 복권을 사라고 했다 - 류흔

 

 

어떻게든 견뎌야 한다.

꼬박 오십팔 년하고

삼 개월 그래왔듯

앞으로도 살아야 한다.

깨진 유리조각처럼

뾰족한 슬픔이나

나의 면모가 상세히 기록된 플라스틱 칩 따위 와작

와작 씹어 삼키며

현장에 가야 한다.

 

그간의 나는

끈질긴 나의 용의자,

누군가에게 추적을 당했다면

범인은 나 자신이다.

고통 없이 잘 찔리기 위해

날을 벼려왔다.

원하는 국면이 찾아오기를

소원하며 살아왔으니

나의 천적이 나일밖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더구나 익지 않은 술을 은밀한 어디에 묻어두었는지

친구에게 가리켜주지 않은 채

나는 죽었다, 어제 밤

야하고 아리따운 꿈속에서.

깜짝 놀라 허둥대면서도 기척 내지 않으려고

아주 멀리 있는 아버지와 가까이 있는

어머니와 다른 방에 잠든 가족을 위해

죽음보다 낮게 숨을 참았다.

 

 

*시집/ 지금은 애인들을 발표할 때/ 달아실

 

 

 

 

 

 

인생 - 류흔

 

 

느리고 기인 일생(一生)

 

죽기 직전에야 안다 인생은

짧다는 것을.

 

미래에서 생각하면

몇 가지 추억,

바람의 낱낱에 실린

가벼운 냄새들.

 

지금 생각하니 적(敵)이 있었고

적이 없었다.

 

적이 없었다는 고백은

그런 적(的)이 없다는 의견일 듯,

 

기일고 느린

일생,

 

언젠가는 나의 무덤이 될 게 뻔한

명백한 인생.

 

 

 

 

# 류흔 시인은 1964년 경북 안동 출생으로 2009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금을 받아 2011년 시집 <꽃의 배후>를 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지금은 애인들을 발표할 때>가 두 번째 시집이다.